〈전통의 덕목과 역사성〉 — 서성록 평론 (1992)
- 기간
- 1992-05-12 — 1992-05-24
- 장소
- 갤러리 이콘
요약
미술평론가 서성록이 1992년 5월 갤러리 이콘 신관개관기념 신장식 개인전 평론으로 작성된 평론. 1989년 토갤러리 개인전, 1991년 신세계미술관 개인전을 잇는 흐름 안에서 작가가 한지·오방색·민속 도상(청사초롱·맨드라미·태극·화염문·엽전·모기향)을 한국적 우주관의 지시물로 재배치하는 작업을 짚는다. 광화문·총독부를 다룬 대형작품을 작가의 "빼앗긴 국운"에 대한 역사 의식의 도해로 해석하며, 명료성과 분석성을 강점으로 둔 한편 형식 기제에 좀 더 민속적인 여과장치가 필요함을 과제로 남긴다.
- 출처
- 작가 블로그
- 저자
- 서성록
본문
〈전통의 덕목과 역사성〉
서성록 · 1992-05-12
신장식이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우리 것의 소중함에 대해서이다. 몇차례의 작품전을 개최하지만, 대부분 그의 작품전은 우리 자신의 얼굴을 찾는 데 바쳐졌다. 가령 89년의 2회 개인전(토갤러리)에서는 전통 문양이나 한국적이라 불리워지는 여러 이미지에 대한 습작을 시도한 바가 있고, 91년의 6회째 개인전(신세계미술관)에서는 전통문양을 현대적 방법으로 발전시키면서 전통 문양속에 스며있는 우리의 정서를 채굴하는 작업을 시도한 바 있다.
이번 작품전도 그의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틀림이 없다. 작품의 주제는 역시 우리의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이며 또 고귀한 것인가를 환기시키는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화가 많고 그 변화의 속도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반전을 거듭하는 시기에 그의 작업내용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지 모르나, 현대미술이 간과하기 쉬운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의 근본적인 문제를 수습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하지만 이 거창하고도 본질적인 문제, 즉 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시각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작가가 소환하는 조형기제들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아주 일상적인 데서 그 조형기제들을 찾아내고 끌어쓴다. 그가 도입하는 이미지란 대체로 민속신앙과 관련된 것이거나 생활풍습과 직결된 것이다. 이를테면 돌맞이 아기의 색동저고리, 화려한 색상의 청사초롱, 불상 광배의 화염문, 구복신앙의 상징물로 원용한 촛불과 木神과 같은 민속적 이미지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맨드라미, 징, 창문 문양, 겨울 나무와 같은 자연적, 인공적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란 굳이 어려운 용어로 설명을 붙힐 필요가 없이 우리 고유의 것을 표출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속에는 전통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이 삼투되어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전통이라도 작가의 독특한 '해석'이 따르지 않는 한 그것은 공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즉 명분과 당위로 끝날 소지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가 전통적 이미지의 '해석'문제에 대해 어떠한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전통해석에 있어 철저함을 기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형태나 이념만 덩그라니 제시하는 그런 비실증적 방법을 택하기 보다는 작업의 시작부터 모든 것을 주제와 관련시키는 꼼꼼함 내지 치밀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제작 과정을 따라가면서 이 점을 관찰하면, 작가는 먼저 닥지를 물에 풀어 갠 다음 액화된 종이를 사전에 떠놓은 밑그림의 형태를 따라 부착시키거나 필요한 부분만 정착시키는 과정을 밟아 질감을 내고 이러한 바탕의 정지작업을 마무리진 후에야 비로소 형태의 줄거리를 잡고 한국적 우주관의 상징인 오방색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재료선택이나 색상, 그리고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주제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엽전, 필기구, 실같은 오브제를 동원하거나 모기향을 부착하는데 이것은 '치환'이나 '물질성'같은 의미로 이해되는 조형적 차원보다는 전자의 경우 돌을 맞은 아이가 엽전을 선택하면 장사군이 되고 필기구를 선택하면 학자가 된다는 식의 풍습과 관계가 있고 후자의 경우 모기향은 보이지 않는 氣를 형체화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브제 자체도 동양적 생활상이나 우주관의 지시물로 가능하게끔 용도변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성'을 표제로 내건(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의 하나는 그가 이 문제를 매우 구체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모호함을 줄이고 대신 명료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각종 문양을 기용함으로써 역으로 작품이 나열적, 설명적으로 흐르는 문제점도 엿보이기는 하지만, 주제의식의 전달을 한층 강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하는 점을 지나칠 수 없다. 더욱이 한지의 포근한 재질감과 문양의 현란함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주제 효과가 크게 발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주제의식을 역사적으로 발전시킨 예가 광화문을 형상으로 담은 대형작품이다. 크기도 크기이거니와 이 작품은 그의 근래 관심사를 측정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 '관심사'란 두말할 나위없이 '빼앗긴 國運'에 대한 것이다. 현재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는 구 조선총독부의 끄트머리가 웅장한 광화문 윗부분에 걸려 있어 불행했던 일제시대, 그러니까 말로만 외치는 일제청산이지 여전히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하나의 논평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올바른 우리의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잔재들이 척결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뚜렷이 반영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렇듯 주제에 해당하는 전통의 덕목과 역사성에 한층 역점을 두기 위해 여타의 부분들, 즉 우연성, 즉흥성 상상력, 오묘한 따위를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통하여 풍부한 감성을 만나는 대신 분명한 의미지시를 체험하게 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에게 바라는 하나의 요망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의미지시를 강조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 고유의 투박하고 덤덤하며 또 정교함은 덜 하지만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체취를 느껴볼 수 있게 형식기제에 대해서도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름없는 陶工들이 무심하게 빚어낸 名器속에서 풋풋한 흙냄새를 맡을 때처럼 풍부한 민족정서의 향기를 맛보게 될 때, 그의 주제적 측면도 지금보다 훨씬 效用性을 지니게 될 것이라 본다. 요컨대 주제를 좀더 민속적인 형식의 여과장치를 경유시켜내는 과정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얘기이며, 이 문제를 그가 지니고 있는 작업의 숙제로 남기고 싶다.
#평론 #서성록 #갤러리이콘 #아리랑
서성록(미술평론가) 평론. 1992년 5월 갤러리 이콘 신관개관기념 신장식 개인전 평론으로 작성. 본 포스팅(90088690714)에는 본 평론 외에도 서정걸 〈전통미의 재해석, 생명과 리듬의 표현〉(월간미술 1994년 4월호, ar-1994-002)이 함께 인용되어 있으나 서정걸 평론은 작가 작업실 방문 기사 성격으로 독립 archive로 별도 보존. ID 충돌(기존 ar-1992-002 〈촛불 켜는 마음〉 작가 에세이) 회피를 위해 ar-1992-004로 신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