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기원
1992 · 91×117 cm · 캔버스에 종이 아크릴릭
이 작품과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글 평론 1992-05-12 · 서성록
〈전통의 덕목과 역사성〉 — 서성록 평론 (1992)
신장식이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우리 것의 소중함에 대해서이다. 몇차례의 작품전을 개최하지만, 대부분 그의 작품전은 우리 자신의 얼굴을 찾는 데 바쳐졌다. 가령 89년의 2회 개인전(토갤러리)에서는 전통 문양이나 한국적이라 불리워지는 여러 이미지에 대한 습작을 시도한 바가 있고, 91년의 6회째 개인전(신세계미술관)에서는 전통문양을 현대적 방법으로 발전시키면서 전통 문양속에 스며있는 우리의 정서를 채굴하는 작업을 시도한 바 있다.
이번 작품전도 그의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틀림이 없다. 작품의 주제는 역시 우리의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이며 또 고귀한 것인가를 환기시키는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화가 많고 그 변화의 속도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반전을 거듭하는 시기에 그의 작업내용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지 모르나, 현대미술이 간과하기 쉬운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의 근본적인 문제를 수습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하지만 이 거창하고도 본질적인 문제, 즉 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시각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작가가 소환하는 조형기제들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아주 일상적인 데서 그 조형기제들을 찾아내고 끌어쓴다. 그가 도입하는 이미지란 대체로 민속신앙과 관련된 것이거나 생활풍습과 직결된 것이다. 이를테면 돌맞이 아기의 색동저고리, 화려한 색상의 청사초롱, 불상 광배의 화염문, 구복신앙의 상징물로 원용한 촛불과 木神과 같은 민속적 이미지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맨드라미, 징, 창문 문양, 겨울 나무와 같은 자연적, 인공적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란 굳이 어려운 용어로 설명을 붙힐 필요가 없이 우리 고유의 것을 표출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속에는 전통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이 삼투되어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전통이라도 작가의 독특한 '해석'이 따르지 않는 한 그것은 공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즉 명분과 당위로 끝날 소지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가 전통적 이미지의 '해석'문제에 대해 어떠한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전통해석에 있어 철저함을 기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형태나 이념만 덩그라니 제시하는 그런 비실증적 방법을 택하기 보다는 작업의 시작부터 모든 것을 주제와 관련시키는 꼼꼼함 내지 치밀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제작 과정을 따라가면서 이 점을 관찰하면, 작가는 먼저 닥지를 물에 풀어 갠 다음 액화된 종이를 사전에 떠놓은 밑그림의 형태를 따라 부착시키거나 필요한 부분만 정착시키는 과정을 밟아 질감을 내고 이러한 바탕의 정지작업을 마무리진 후에야 비로소 형태의 줄거리를 잡고 한국적 우주관의 상징인 오방색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재료선택이나 색상, 그리고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주제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엽전, 필기구, 실같은 오브제를 동원하거나 모기향을 부착하는데 이것은 '치환'이나 '물질성'같은 의미로 이해되는 조형적 차원보다는 전자의 경우 돌을 맞은 아이가 엽전을 선택하면 장사군이 되고 필기구를 선택하면 학자가 된다는 식의 풍습과 관계가 있고 후자의 경우 모기향은 보이지 않는 氣를 형체화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브제 자체도 동양적 생활상이나 우주관의 지시물로 가능하게끔 용도변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성'을 표제로 내건(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의 하나는 그가 이 문제를 매우 구체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모호함을 줄이고 대신 명료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각종 문양을 기용함으로써 역으로 작품이 나열적, 설명적으로 흐르는 문제점도 엿보이기는 하지만, 주제의식의 전달을 한층 강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하는 점을 지나칠 수 없다. 더욱이 한지의 포근한 재질감과 문양의 현란함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주제 효과가 크게 발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주제의식을 역사적으로 발전시킨 예가 광화문을 형상으로 담은 대형작품이다. 크기도 크기이거니와 이 작품은 그의 근래 관심사를 측정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 '관심사'란 두말할 나위없이 '빼앗긴 國運'에 대한 것이다. 현재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는 구 조선총독부의 끄트머리가 웅장한 광화문 윗부분에 걸려 있어 불행했던 일제시대, 그러니까 말로만 외치는 일제청산이지 여전히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하나의 논평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올바른 우리의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잔재들이 척결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뚜렷이 반영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렇듯 주제에 해당하는 전통의 덕목과 역사성에 한층 역점을 두기 위해 여타의 부분들, 즉 우연성, 즉흥성 상상력, 오묘한 따위를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통하여 풍부한 감성을 만나는 대신 분명한 의미지시를 체험하게 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에게 바라는 하나의 요망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의미지시를 강조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 고유의 투박하고 덤덤하며 또 정교함은 덜 하지만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체취를 느껴볼 수 있게 형식기제에 대해서도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름없는 陶工들이 무심하게 빚어낸 名器속에서 풋풋한 흙냄새를 맡을 때처럼 풍부한 민족정서의 향기를 맛보게 될 때, 그의 주제적 측면도 지금보다 훨씬 效用性을 지니게 될 것이라 본다. 요컨대 주제를 좀더 민속적인 형식의 여과장치를 경유시켜내는 과정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얘기이며, 이 문제를 그가 지니고 있는 작업의 숙제로 남기고 싶다.
- 복합 평론 1994-04 · 서정걸
월간미술 1994년 4월호, 〈전통미의 재해석, 생명과 리듬의 표현〉 — 서정걸 평론 (1994)
재료가 가진 고유의 리듬에 대한 인식, 그 리듬에 자신의 호흡을 일치시키는 작업
신장식의 작업실은 서울과 성남시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한적한 마을 뒤편에 있다. 꽃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야산과 과수원들이 펼쳐져 있는 매우 전원적인 모습의 마을이다. 그는 공장용으로 지어놓은 슬레이트 건물 한 칸을 임대하여 작업실로 쓰고 있는데, 여섯 개의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는 그 건물은 모두 화가들에게 임대되어 하나의 집단 스튜디오를 이루고 있다. 신장식 이외에 이기봉, 윤해남, 장문걸, 이인희 등이 일찍부터 그곳에 터를 잡았고, 최근에 홍승혜가 새로 입주했다. 이들은 모두 화단에서 부각되고 있는, 시쳇말로 잘나가는 신인들이다.
비록 도심에서 벗어난 외딴 곳에 위치해 있지만 젊은 작가들의 작업열기로 그곳은 활기에 차 있다. 조만간 작업실을 개방하여 자신들의 작업을 알몸으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의욕에 찬 젊은 작가들이 서로 교류하며 자신의 세계를 가꾸어가고 있는 그곳은 머지않아 화단에 화제를 불러일으킬 범상치 않은 열기로 가득하다.
젊은 작가들의 아지트라고 할 만한 그곳에는 작업열기와 함께 경쟁심리가 또한 숨어있기도 할 것이다. 신장식은 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곧바로 이곳에 와서 그림연구에 몰두한다. 어쩐지 작업이라기보다는 연구 또는 탐구라는 말이 적절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의 작업실에 놓인 판화제작용 프레스기, 다양한 색채의 물감이 담긴 각종 그릇들, 판화 건조대, 캔버스를 손수 제작하기 위해 들여놓은 다기능 콤프레샤, 종이의 원료가 담긴 그릇 등이 실험실에 들어온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가 탐구해 온 것은 리듬의 표현에 관한 것이다. 리듬의 표현은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고, 화면이 리듬감으로 충만될 때 관찰자가 화면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교감은 풍부해진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리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호흡과 재료의 리듬이 합치되는 지점을 찾는 것"이 그의 연구과제이다. "처음엔 작의가 강했었는데, 차츰 재료의 리듬을 인식하게 됐고, 그 리듬의 인식 위에서 작업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도 나오고 생동감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게 됐다. … 생명이 불어넣어지지 않은 작품들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인가?" 대략 이러한 요지로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바로 생명력, 리듬, 율동 등과 같은 개념들이 그의 작품의 기본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럼으로써 작위를 배제하고 그 자신과 재료의 리듬을 따라 작업할 때 자연이 지닌 생명력과 자신의 정서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전통미술의 오랜 미학적 핵심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주 작품에 동원하고 있는 전통적이고 민속적인 소재들은 그러한 미학적 명제를 실현시키기 위한 통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 명제들에서 '아리랑', '청사초롱' 등 전통적인 소재의 명칭 뒤에 '생명력'이란 단어가 붙어 다니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에는 민속적인 조형물들의 이미지들로부터 자연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전통 탐구의 폭이 그만큼 깊고 넓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자연을 소재로 택할 때에도 전통적인 이미지가 강한 소나무·민들레·들국화·맨드라미 같은 대상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들 소재가 주는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뉘앙스를 화면 전체에 배치하려는 것과 율동감을 강조하려는 표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은 그러므로 그의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그는 산수화나 화조화 같은 전통 회화기법에서 착안한 것처럼 보이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두텁고 푸근한 질감의 표현과 강렬한 색채 대비 등을 통해 한국미의 특질에 다가가고자 한다.
전통적 이미지와 정서의 발견을 통한 전통미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대략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지난 88올림픽 때 개막식과 폐회식 행사의 미술 조감독(총감독은 서양화가 이만익씨)을 맡았었는데, 그때 수많은 민속자료들을 수집했고, 전통 조형물들의 조형성과 내용을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북의 행렬〉, 〈혼돈〉, 〈떠나가는 배〉 등의 프로그램이 그가 기획했거나 참여한 것들이었는데, 능행도나 고유의 민속놀이를 바탕으로 기획된 것이다. 동원된 소품들도 전통 의상용 깃발, 청사초롱 등 민속적인 소재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온갖 깃발들의 물결, 청사초롱의 행렬 등을 보고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즉 그 개개의 것들이 모여 총체적인 것으로 보여질 때 거기에서 발산되는 율동과 생동감이 그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것이 그의 작품세계로 이어진 것이다. "불빛의 흔들림, 색채의 율동, 그것이 총체적인 것으로 보여질 때의 감동 … 바로 이러한 소묘법이 우리 고유의 미의식이며 자기 정체성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양식이나 형식보다 정서 그 자체가 더 중요하고 우리의 공통인자로서의 정서를 깊이 있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작품세계의 심도를 높여준 또 하나의 계기는 목판화에의 관심이다. 목판화를 제작하면서 그는 나무에 새겨지는 형태와 나무가 가지고 있는 성질(즉 생명력과 리듬)과의 관계가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무와 내가 만난다는 것, 나무에 형태를 새겨서 찍어내지만 그러한 행위가 어떤 리듬감을 고려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의 차이는 아주 미묘하지만 본질적인 문제이다"라는 그의 설명은 결국 표현된 대상의 모습보다 그 속에 어떻게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자신의 감성을 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화면에 리듬감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뿌리기와 노끈 붙이기 등의 방법을 도입했다. 그는 구불구불한 선들로 구획된 형태들의 유기적 결합, 화면 위에 난무하는 가늘고 예리한 선들, 강렬한 색채의 대비 등이 그의 의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한 원리와 개념들을 가지고 작업한 결과는 바로 한국적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새로운 조형성의 탐구이다.
월간 미술 1994년 4월호
![[관련 자료] 월간미술 1994년 4월호 〈젊은 시각〉 코너 — 〈전통미의 재해석, 생명과 리듬의 표현〉 서정걸 기자 평론 첫 page. 헤더 디자인과 작가 작업실 portrait (청사초롱 배경 앞 신장식 작가)이 함께 게재 (작가 블로그에서 수집)](/archive/ar-1994-002/01.jpg)
![[관련 자료] 월간미술 1994년 4월호 본문 중간 page 스캔 (작가 블로그에서 수집)](/archive/ar-1994-002/02.jpg)
![[관련 자료] 월간미술 1994년 4월호 본문 중간 page 스캔 (작가 블로그에서 수집)](/archive/ar-1994-002/03.jpg)
![[관련 자료] 월간미술 1994년 4월호 본문 후반 page 스캔 — 신장식 작품 도판 3점(청사초롱 시리즈·원형 작품 1992·격자 사각 작품 1992) 게재 (작가 블로그에서 수집)](/archive/ar-1994-002/0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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