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의 빛〉 — 최태만 평론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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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
- 2005-10-26 — 2005-11-01
- 장소
- 모란갤러리 (인사동, 서울)
요약
신장식의 2005년 개인전 〈금강산의 빛〉(모란갤러리)에 부친 미술평론가 최태만의 비평. 2004년 〈10년의 그리움〉에서 진일보한 대경산수의 시선, 정신적 차원의 빛, 분단의 비극을 품은 금강산의 정치적·역사적 의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전통과의 연결을 짚는다.
- 출처
- 작가 블로그
- 저자
- 최태만 (미술평론가)
본문
〈금강산의 빛〉
최태만 (미술평론가) · 2005-10-26
지난 2004년 신장식은 '10년의 그리움, 금강산'이란 주제로 지난 십년간 한눈팔지 않고 꾸준하게 추구해온 금강산그림을 중간 결산하는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1998년 금강산이 열리기 이전부터 금강산을 화두삼아 그려온 작품들에 나타나던 활달하고 생동하는 필치와 밝고 경쾌한 색채와 어우러진 낙천적인 시각이 바야흐로 무르익어 농숙(濃熟)의 경지에 이른 그의 금강산 그림은 금강산이란 한 대상으로 향한 십년간의 사랑이 이루어낸 성과였음에 분명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폐막식 기획팀에 참가하면서 전통의 계승에 심혈을 기울여온 그가 비록 사진으로 보았던 것이나마 금강산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하고 운명처럼 매달려온 화제(畵題)를 두루 망라한 이 작품들은 한편으로 작가 자신에게도 새로운 변화를 요청하는 자기점검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 결과가 이번 전시에 조심스럽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으로 대경산수(大景山水)를 보듯 넓게 펼쳐진 풍경과 다소 장식적인 표현을 자제하고 보다 실경에 충실하려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 바 이는 금강산의 진상(眞相)을 보다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표현하려는 의도의 발현이자 지난 전시 이후에도 세 차례 더 금강산을 답사하며 스케치한 진경에 충실하고자 한 태도가 구체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전시의 주제를 '십년의 그리움'으로부터 '금강산의 빛'으로 보다 내면화시킨 것도 금강산을 정서적으로 수용하던 차원에서 실재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상징적 의미를 강화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빛은 서구의 바로크나 인상주의 회화가 추구했던 빛과 색채와 상통하는 부분도 있으나 그의 작품은 시각적 투명성 못지않게 금강산을 통해 역사와 현실을 되돌아보도록 하기 때문에 오히려 보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채택한 것임에 분명하다. 즉, 그의 풍경화는 자연의 외경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역사와 그것을 넘어서는 이상(理想)에의 동경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것이다.
먼저 금강산이란 이름 자체가 불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발원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금강(金剛)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며 변함없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선종의 대표적인 경전인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고 능히 일체를 끊어 없애는 진리의 말씀이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그가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금강산을 그린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금강산을 그리는 그 시간만은 그 산세를 통해 변함없는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더욱이 정치적, 이념적 갈등에 의해 야기된 남북분단이란 역사적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금강산이기에 그가 금강산을 단지 아름다운 대상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이러한 분쟁을 극복할 수 있는 상징적 대안으로 여기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의 참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유장한 산하는 인간의 이기적 욕심이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가 천착하는 금강산의 빛은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가시광선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그려낸 금강산의 사계는 여전히 유장하고 시원하지만 그 속에는 온갖 역사적 질곡과 영광이 잠재해 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어려움을 단지 고통과 절망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희망을 본다. 빛은 그러므로 금강산을 비추는 광선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잃어서는 안될 희망의 빛이다. 굽이치는 산맥, 그 앞에 두드러진 상록의 소나무, 눈 덮인 고즈넉한 봉우리와 계곡이 근경과 원경으로 물결치는 그의 그림에서 역시 그의 낙관적인 세계관을 읽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그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엄연히 존재하는 모순과 질곡을 망각하려는 '회피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책을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금강산, 별도의 여행증명서를 소지하여야 하고, 제한된 지역만 답사할 수 있는 현실의 한계는 그가 채택한 소재에서 어렴풋하게 드러나고 있다. 말하자면 그가 답사한 장소만을 그릴 수 있었다는데서 분단의 비극은 여전히 엄연한 현실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단을 시각적으로 제시하기보다 금강산의 풍경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켜켜이 쌓인 시간의 누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번 전시에 그가 많이 그린 세존봉(世尊峰) 너머에 있는 금강산의 다른 모습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은 통일의 희망과 맞닿아 있다. 십년을 그런 기다림으로 금강산을 그려왔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금강산은 여전히 미완의 프로젝트이다.
혹자는 이 작가가 십년 넘도록 금강산을 그리는 것에 대해 고개를 갸웃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조급해 할 이유는 없다. 금강산을 가장 금강산답게 표현한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삼십대 중반에 스승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을 따라 금강산을 다녀온 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 이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거쳐 마침내 진경산수를 이룩하여 타계할 때까지 주옥같은 금강산그림을 남겼으니 정선이야말로 사십 여년 동안 금강산에 전념한 위대한 화가인 것이다. 이런 점을 주목할 때 신장식의 금강산 그림은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그의 과제이자 풍경화를 시대에 뒤떨어진 장르라 하여 외면하려는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알리는 소명의 실천이라 주장한들 과장된 수사(修辭)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금강산의 빛이 통일의 미래를 비추는 빛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작업세계를 더욱 옹골차게 가다듬는 서광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도 지나친 기대는 아니리라. 이 전시를 계기로 그가 집요하게 추구해온 금강산을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심화시켜 독자적 내용과 양식을 확립할 수 있기를 바란다.
#비평 #금강산 #빛 #진경산수 #최태만 #모란갤러리 #겸재 정선 #분단
관련 아카이브
- 글 평론 2018-08-29 · 최태만
〈"지금, 여기"의 금강산의 12경을 그리다〉 — 최태만 평론 (2018)
'지금, 여기'의 금강산의 12경을 그리다.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선이 출항하면서 남북분단 이후 50여년 만에 비록 외금강지역으로 국한되었지만 남한주민들도 금강산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금강산관광은 남북교류의 물꼬를 여는 사건이었고, 2007년 6월부터 내금강의 일부지역까지 개방되었으나 불과 일 년 후인 2008년 7월부터 관광이 전면 중단되면서 금강산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곡처럼 '그리운 금강산'이 되고 말았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봉래(蓬萊), 봉우리와 계곡을 단풍이 뒤덮는 가을에는 풍악(楓嶽), 나뭇잎이 지고 암석이 드러나는 겨울에는 개골(皆骨)이란 시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금강산이다. 그래서 이미 고려시대부터 중국에 보내는 선물로 금강산을 그린 그림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을 답사하며 그 아름다운 자태를 표현했다. 심지어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을 계승한 최북(崔北)이 금강산을 유람하다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 명사 최북이 천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연못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고 하니 금강산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평생에 한번이라도 꼭 방문하고 싶은 명승지임에 분명하다.
신장식은 금강산이 열리기 전부터 금강산을 그려왔고, 관광이 시작되자마자 동해항에서 장전항으로 첫 출항한 현대금강호를 타고 금강산으로 갔다. 그 후, 그는 마치 신들린 마냥 수없이 금강산을 찾았고 그럴 때마다 더 신명나서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아왔다. 말하자면 금강산이 그의 작업에 동기를 부여하며 그로 하여금 작업의 이유를 찾도록 채근했던 것이다. 실경에 충실하되 단순히 풍경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금강산의 피부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작품은 금강산으로 향한 경외심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동안 많은 개인전을 통해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금강산을 그려오던 신장식이 이번에는 금강12경을 주제로 전시를 연다. 자신이 살던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에서 성리학을 성립한 주희(朱熹)는 무이산 아홉 골짜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남겼는데 훗날 많은 화가들이 이 시를 바탕으로 많은 무이구곡도를 그렸다. 또한 양자강 중류에 있는 동정호란 큰 호수를 이루는 물줄기인 소수(瀟水)와 상수(湘水) 주변의 아름다운 산수를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역시 명승을 주제이자 소재로 채택한 것으로서 다 같이 각기 다른 절경을 아홉 폭 혹은 여덟 폭으로 그렸다면 봄여름가을겨울의 풍경을 그린 사계도의 전통 또한 그 역사가 길다. 넓고 깊어 수많은 비경을 가진 산이기는 하지만 신장식이 금강산이란 한 대상을 열두 달로 나눠 그렸으니 공간에 덧붙여 작품 속에 시간마저 담아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금강12경은 마치 12개의 시를 읊듯 차례차례 음미할 때 그 풍치가 배가된다. 아니면 절기별로 묶어 감상할 수도 있고 작품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전경의 소나무를 실루엣으로 처리하고 중경의 바위산은 충실하게 사생하되 원경을 다시 청색으로 처리한 〈옥류동의 빛〉, 안개가 자욱한 수정봉을 배경으로 한껏 흐드러진 꽃을 그린 〈온정리의 봄〉, 녹음이 짙어가는 〈수정봉의 빛〉은 빛을 통해 금강산의 생동하는 봄기운을 느끼게 만든다. 이어서 바야흐로 싱싱한 초목에 포위된 채 성숙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만폭동의 빛〉, 비에 젖어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칠월의 만물상,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우뚝 선 채 파도를 맞이하는 〈해금강의 여름〉에 이르면 봉래산의 성숙미를 감상한 것과 진배없다. 여기에 금수강산(錦繡江山)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구월의 백두대간,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은 삼선암, 조금씩 겨울채비를 하며 기암괴석을 드러내는 집선봉은 아름다움의 절정에 이른 풍악산 속으로 들어선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침묵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비로봉에서 산하의 유장함에 사뭇 겸손해지다 하늘에 핀 꽃과 같다 하여 천화대라 불리는 봉우리에 덮인 눈과 산세를 푸른빛으로 그린 〈천화대의 빛〉으로부터 이제 막 생명의 움틀 틔우는 초목들에 둘러싸인 만물상에 이르는 것이다. 이 시간여행을 관류하는 것이 금강산의 빛이니 신장식의 작품에서 그 빛은 푸르스름한 색조로 드러난다. 그것은 그의 작품을 휘감고 있는 서기(瑞氣)이자 작품에 생명을 부여하는 원동력이다. 그 빛에 다시 잠기기 위해서라도 금강산은 다시 열려야 할 것이다. 신장식의 금강12경은 우리로 하여금 금강산이 '지금, 여기에'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현재형으로 우리 앞에 있다.
최태만 / 미술평론가
- 글 평론 2012-11-15 · 최태만
〈길 위의 수행자 혹은 길을 찾는 사람〉 — 최태만 평론 (2012)
삼매(三昧)를 찾아서
2007년 내금강을 다녀온 신장식은 만폭동, 보덕암, 표훈사, 장안사터 등 내금강의 아름다운 산하를 표현한 풍경화와 함께 〈내금강 묘길상〉을 발표했다. 북한이 국보 문화유물 제102호로 지정한 이 묘길상(妙吉祥)은 고려 말기에 묘길상암을 중창한 나옹(懶翁) 화상이 새겼다고 전해지는데 높이 40미터의 암벽에 불상의 높이만 15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마애불이 있는 터에 한때 묘길상암이 있었기 때문에 문수보살을 지칭하는 묘길상이라 불리고 있지만 불상의 상호(相好)와 내영인(來迎印)을 결한 수인 등으로 볼 때 아미타여래임에 분명하다.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할 때부터 이미 연꽃이나 만다라와 같은 불교적 특징이 드러나는 작업을 한 바 있고, 2001년의 개인전에서는 명상에 잠긴 작가 자신의 모습을 종이로 주조한 조각을 통해 불교에의 관심을 보여준 신장식이 불상을 그린 것은 묘길상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화면 속에 내금강을 찾은 관광객들을 함께 그려 넣음으로써 이 작품은 불상 그 자체를 주제로 한 것이라기보다 불상이 있는 풍경을 실경으로 그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작심하고 불상을 그리고 있다. 그것도 경주 삼화령에서 발굴된 미륵삼존불 중에서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고 있는 우협시 보살상으로부터 국보 83호 보살반가사유상,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등 우리나라의 불상은 물론 중국 맥적산석굴의 보살상과 파키스탄의 간다라 유적에서 출토된 불상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번에 그린 불상은 다양한 지역과 시대를 아우르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속에 우리나라의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석굴암 본존불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전시의 주제인 삼매에 집중하여 삼매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불상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삼매는 고대 인도문자인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를 음역한 것이지만 그 뜻에 따라 정(定), 심일경성(心一境性) 또는 일심불란(一心不亂)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 석가모니의 수행을 함축한 개념으로 특히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에서 월광동자(月光童子)의 질문에 대해 석가모니 붓다가 말씀하신 '일체제법체성평등무희론삼매(一切諸法體性平等無戱論三昧)'는 삼매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삼매를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삼매에 들면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출가 이전부터 고타마 보살은 선정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출가 후에는 알랄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와 같은 브라만 수행자를 통해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 이르렀으나 그것으로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 극단적인 고행을 하다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들어 마침내 성도했으므로 삼매야말로 자아를 초월하여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장식은 지극히 깊은 선정(禪定)에 든 불보살을 새긴 불상을 다시 그림으로써 그 삼매지경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고 있다.
길 위의 수행자
언젠가 신장식은 자신에 대해 "내 인생에 50대는 길 위의 수행자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로서는 그가 종교적 발심으로 스스로를 수행자로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예술가의 길도 수행자의 길이며, 그림도 수행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찾으러 세상을 그렇게 다니고 동서고금을 헤맸나? 조금의 빛이라도 표현해낸다면 좋겠다. 나는 그림으로 '희망의 아리랑'을 노래하고 싶다."라고 했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말한 수행자는 '길을 찾는 사람'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는 수많은 길을 걸었다. 그 중에서 라사로부터 카트만두에 이르는 티베트 여행과 두 차례에 걸친 인도여행, 그리고 2011년 시안(西安)에서 출발하여 하서회랑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간다라지역에 이르는 실크로드 순례는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수행자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진정한 길 위의 수행자인 석가모니와 만났다. 석가모니야 말로 길에서 태어나 길이 있는 숲에서 성도하고, 무수한 길을 다니며 자비로서 중생들을 제도하고 길에서 열반한 분이시지 않는가. 많은 불경 중에서 '길 위의 수행자'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화엄경』의 「입법계품(立法界品)」일 것이다. 입법계품의 수행자이자 구도자인 선재(善財)동자는 가르침을 얻기 위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서원(誓願)의 실천자인 보살만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만난 53선지식에는 보살, 비구, 비구니, 여신도는 물론 불교에서 외도라고 배척해온 브라만, 출가자, 선인, 신을 포함하여 왕, 장자, 의사, 뱃사공, 부인 등의 속인과 소년, 소녀, 심지어 매춘부로 알려진 여인도 있었다. 이처럼 불교는 구도행의 길 위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도에 이를 수 있음을 깨우치게 한다. 주체와 객체를 나누지 않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불교의 이러한 개방성과 혁신성이 신장식으로 하여금 길을 걷게 유도한 연기(緣起)일 것이다.
신장식이 걸었던 길은 신라에서 당으로 유학을 했던 혜초(慧超)가 구법을 위해 걸었던 길이었다. 그 전에는 법현(法顯)과 현장(玄奘)이 그 길을 갔다. 그 외에도 남북시대 중국으로 유학한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과 담징(曇徵), 백제의 겸익(謙益)과 혜총(慧怱), 신라의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등도 한반도에서 출발해 중국으로 갔고, 당의 수도인 장안에서 출발한 아리야발마는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날란다에서 율장과 논장을 연구하였으나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날란다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오늘날에야 여행프로그램도 있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옛날 구법승들처럼 목숨을 걸고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장식은 그들이 이미 지나쳤던 길을 다니며 석가모니는 물론 구마라습(鳩摩羅什), 마라난타(摩羅難陀) 등의 선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불상을 그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주공간에 편재하는 불성(佛性)
그런데 그는 왜 하필이면 불상을 그리는 것일까? 그것도 이미 잘 알려진 문화유산이자 예배물인 불상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불상이 출현했을 때부터 붓다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미 '32상 80종호'란 규범이 적용되었던 바 이 규범은 예배대상으로서의 불상을 제작할 때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또한 부처님의 성스러운 상호(相好)는 아무나 함부로 만들 것이 아니므로 지극한 신앙심과 수행자의 청정한 마음으로 제작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장식이 그린 불상은 분명 예배대상이 아니다. 불상을 그리는 것은 예술가로서 그가 마음속에 품어왔던 붓다로 향한 경건한 외경(畏敬心)이 외현(外顯)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했을 때 그 시신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전한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의 몸을 수습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 아난다여, 그대들은 근본에 힘쓰고 근본에 몰두하여라. 근본에 방일하지 말고 근면하고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러라. 아난다여, 여래에 청정한 마음이 있는 크샤트리아 현자들과 장자 현자들이 여래의 몸을 수습할 것이다."
임종의 때가 가까워지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이여, 형성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라"라는 최후의 유훈을 끝으로 반열반에 들었다. 마침내 석가모니 붓다가 쿠시나가라의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하자 제자들은 붓다의 시신을 꽃으로 장식하여 일주일 동안 모셨다. 붓다의 열반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급히 오고 있던 마하카샤파(Maha Kasyapa)를 기다리던 제자들은 일주일이 지난 후 붓다의 시신을 마쿠타반다나(Makutabandhana) 사원으로 옮겼다. 마하카샤파가 도착하자 그의 지휘 아래 제자들은 붓다의 시신을 인도의 전통 장례의식에 따라 화장하여 사리를 수습하였다. 석가모니의 열반을 슬퍼하지도 말고, 시신을 수습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는 마지막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온 여덟 명의 왕과 장자, 제자들은 그 사리를 나눠 가져가 각각 스투파를 세우고 그 속에 사리를 모셨다. 바로 이 순간에 불교미술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마우리야(Maurya)왕조의 아소카(Ashoka)왕은 석가모니 붓다의 사리를 다시 수습하여 인도 전역에 팔만 사천 개의 스투파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한 동안 붓다의 형상을 새긴 불상을 대신한 수레바퀴(法輪), 붓다의 발자국, 보리수 등으로 붓다의 존재를 상징하던 무불상(Aniconism)의 시대를 거쳐 쿠샨 족이 인도를 지배하던 기원 후 1세기경 마투라와 간다라 지역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불상이 나타났다.
헬레니즘과 로마,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양식과 인도조각의 전통 아래 형성된 마투라 양식은 각각 고유한 양식으로 발전하다 이민족이 세운 쿠샨왕조를 무너뜨리고 다시 인도인들에 의해 수립된 굽타왕조에 이르러 다시 한번 비약적인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석가모니가 성도한 후 범천의 권청(勸請)으로 첫 설법을 했던 사르나트의 박물관에는 굽타시대인 5세기경 제작된 사르나트 양식의 아름답고 우아한 불상이 있다. 물론 이미 불교는 아소카 왕의 전제적인 포교정책에 의해 인도 전역은 물론 스리랑카를 비롯하여 남방과 서아시아, 헬레니즘 제국으로까지 전파되었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인도로 침입했던 쿠샨 인들도 불교로 개종한 후 각별히 불교를 신앙하였으며, 카니슈카 왕의 대대적인 호법, 포교정책에 따라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기록상 우리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으로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苻堅)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면서부터였다. 이때 순도가 불경과 불상을 들고 왔다고 하므로 그를 통해 불상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불교전래설은 지배계급에 의한 공식적인 수용을 기록한 것이므로 민간에서는 이미 그 전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침류왕 1년(384년)에는 인도 스님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을 거쳐 백제로 와서 불교를 전하였다. 신라 역시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거치며 어렵게 불교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서라벌에 가람과 탑파가 기러기처럼 많았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빠른 시간 안에 불교를 국가종교로 확립하고 황룡사, 분황사와 같은 큰 사찰을 세웠다. 그 후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는 불교를 신앙으로서 뿐만 아니라 통치이념으로 삼아 무수하게 많은 가람, 불상, 탑을 조성하고 불경을 사경(寫經)하고 불화를 그렸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신장식의 작품에서 모티브이자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룸비니로부터 전정각산, 보드가야, 사르나트, 왕사성, 기원정사, 죽림정사, 대원정사, 쿠시나가르, 날란다 유적과 함께 산치대탑, 아잔타, 엘로라석굴 등을 돌아보고 여러 지역의 박물관에서 불상을 친견한 그는 비단 한국의 불상에만 그치지 않고 간다라와 마투라 양식의 불상, 굽타시대의 사르나트 양식의 불상 중에서 삼매지경의 불상을 골라 그것을 다시 자신의 회화 속에 재현해 놓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단순히 이 불상들을 재현하는 것에만 그쳤더라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모방하는 것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말했던 이데아의 모방인 현상계를 모방하는 화가와 무엇이 다를 바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우주에 편재하는 불성(佛性)을 상상했다. 사르나트에서 석가모니가 행했던 첫 설법을 나타낸 초전법륜인을 결하고 있으나 깊은 삼매의 상호를 보여주는 간다라불상의 배경에 조선 초기의 천체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을 그려놓고 그 좌우에 용주사(龍珠寺) 범종의 천의를 휘날리며 승천하고 있는 비천상을 배치한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좌우의 두 비천이 석가모니의 초전법륜, 즉 자비의 말씀을 우주공간으로 전달하는 형국으로 이것이야말로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시각적 구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주공간에 편재하는 불성은 타원형의 성운(星雲) 가운데 불두를 배치해 놓은 작품이나 삼면화 형식의 작품에서 더 극적으로 고양된다. 화면을 세 개로 나눠 좌우에 성덕대왕신종의 날렵한 비천상을 그리고 그 중앙에 무념무상에 이른 해탈의 경지와 중생제도의 염원이 서린 오묘한 미소를 띤 국보 83호 보살반가사유상을 반신으로 그려놓은 작품은 무수한 별자리로 수놓인 우주공간의 블랙홀과 같은 깊은 심연으로부터 보살이 문득 돌출하고 있는 듯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부여 못지않게 그의 작품에서 회화적 고려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본 불상의 실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형태를 변형하거나 왜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화령 미륵삼존불의 협시보살을 그린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화강석의 질감이 느껴지도록 표면에 종이죽을 바르고 음영을 표현했다. 그래서 불상의 화강석 질감은 강조되고 있으나 평면적이며 선적으로 표현한 비천과 판화로부터 오려낸 촛불을 붙여 재현과 표현, 입체와 평면, 구상과 추상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화면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맥적산석굴의 북위대에 조성된 불상을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한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데칼코마니한 듯, 서로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내용에서 불교의 불이(不二)의 사상을 떠올리게 만들 뿐만 아니라 화면의 공간감을 통해 형상이 우주공간으로 녹아드는 시각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래서 화면의 중앙으로 갈수록 형상은 사라지고 어스름하고 추상적인 빛의 파동이 파장을 일으키며 중심으로 빨려들어 가거나 혹은 소리의 파동이 밖으로 울려 퍼지는 시청각적 공간을 느낄 수 있다.
사르나트에서 남산으로, 다시 자기에게로
스스로 길 위의 수행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신장식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에게 있어 여행은 단지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재충전을 위한 휴지(休止)의 시간이거나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제공하는 보상(報償)이 아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고, 그 대상이 떠오르면 계속 몰입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산치대탑에서 무불상시대 석가모니부처가 보리수나 발자국, 법륜으로 표현된 것을 발견했고, 탁실라박물관에서 헬레니즘과 로마미술이 불교와 습합하여 나타난 간다라불상을 발견했다. 사르나트박물관에서는 5세기 인도 불교미술의 걸작과 만났으며,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을 때는 이 길에서 죽어간 무수하게 많은 구법승들의 고행과도 만났다. 탈레반이 출몰할지도 모를 간다라지역의 길기트에서 마애불을 보았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이 결코 고행은 아니었다. 어쩌면 실크로드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즐거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실크로드에서 돌아온 후 그는 혼자 경주 남산으로 갔다. 서산마애불과 같은 부조의 경우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시간을 달리하며 그곳을 찾기도 했다. 비단 불상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전거(典據)를 찾아 열심히 불교공부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그의 대화주제는 온통 불교로 가득하다. 금강산여행이 열리기 전 금강산을 그릴 때도 그랬다. 금강산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조사, 연구하며 그것을 화면 위에 재구성했다. 이러한 열정은 금강산 개방 후 수많은 현지답사를 통해 그를 '금강산화가'로 만드는 동력이기도 했다.
열정이 과도하면 집착이 될 수 있지만 불상을 그리는 것도 어떤 원력(願力)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는 신앙심에 이끌려 예배의 대상인 불상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어쩌면 불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깃들어있는 깊은 사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불상을 방편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마치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이러한 앎에의 욕구란 동기가 작용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직관적이면서 동시에 분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아리랑으로부터 금강산, 그리고 불상에 이르기까지 신장식의 그림 속에서 갈등과 대립은 없다. 그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가 찾는 것은 '희망의 아리랑'이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분명하게 단언할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빛과 같은 것을 찾아가는 것. 그것에 대해 도달하기 위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위빠사나), 집중할 수도 있고(사띠), 그것조차 여의고 지극히 무념무상한 상태(사마디)에 들 수도 있다. 예술의 길과 선정의 길은 다르다. 그 다름이 예술을 풍요롭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 궁극으로 가고자 하는 것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반야바라밀은 불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 글 평론 2007-10-31 · 최태만
〈라싸에서 카트만두까지 — 맑고 투명한 색채로 표현한 티베트의 자연과 문화〉 — 최태만 평론 (2007)
"라싸에서 카트만두까지"란 제목으로 마련한 이 전시는 2005년 신장식 교수가 나와 티베트를 함께 여행한 기억을 기록한 것이다. 라싸와 카트만두를 연결하는 우정공로(友情公路)를 따라 티베트를 떠나 네팔로 들어갔을 때이다. 에베레스트란 이름으로 더 알려진 쪼모랑마(珠穆朗瑪, Qomolangma)가 보이는 듈리켈 호텔에서 여행기를 출판하고 싶은데 작품을 수록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신 교수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각자 작업에 착수했지만 『한국현대조각사연구』의 집필을 마무리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나의 글은 여행 중 노트북에 기록해 두었던 짧은 인상기를 다듬는 수준에서 답보만 하고 있었다. 더욱이 티베트미술의 전공자는 아니지만 티베트미술의 역사와 도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티베트미술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무모하고 가당찮은 욕심까지 부리다보니 탈고는 한없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신 교수는 작품을 끝내놓고 일 년 가까이 글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 기간 동안 티베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2006년 7월, 베이징에서 출발하여 시안(西安), 란주(蘭州), 시닝(西寧), 거얼무(格尔木)를 거쳐 라싸에 이르는 4,064km 구간을 47시간동안 달리는 칭짱(靑臧)열차가 개통한 것이다. 우리가 여행할 당시는 이 철로가 개통되기 전이었으므로 베이징에서 중국 민항기를 이용해 청두(成都)를 거쳐 라싸로 갔다. 칭짱열차의 개통과 함께 티베트를 찾는 관광객들도 현격하게 늘어 문명의 쓰레기에 대해 고민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고 하니 불과 이 년밖에 안 지났지만 티베트가 어떻게 변하였을지 자못 궁금하다. 게다가 라쩨(Latse, 拉孜)를 지나치면서 여러 곳에서 비포장도로를 포장하는 공사현장도 목격했으므로 이제 이 설역고원의 주요 간선도로들은 상당부분 포장되었을 것이다.
티베트 고원의 여러 지역에서 '바람의 말'이란 이름을 가진 룽다를 보기란 어렵지 않다. 고갯마루나 들판에 돌무더기를 쌓고 그 위에 다섯 가지 색깔의 천을 매달아놓은 '바람의 말'은 가혹한 자연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에게 희망이자 구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라싸나 시가쩨(Shigatse, 日喀则)와 같은 역사적인 도시의 불교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티베트인들을 보면 그들이 시간을 초월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점은 룽다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 여행의 안녕과 같은 개인적인 염원으로부터 신의 가호와 조상의 극락왕생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망을 담아 바람에 날려 보내는 이 룽다는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담고 있다. 어디 그것뿐이랴. 티베트 산하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는 마니석에 새겨진 '옴모니페메훔'이란 육자진언(六字眞言)은 티베트불교가 티베트인들의 삶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정신의 지주인지를 실감나게 만든다. 고원의 가파른 언덕을 오체투지로 오르고 있는 티베트인들의 남루한 모습을 보면 너무나 투명한 그곳 하늘처럼 그들의 마음이 순결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게 한다. 룽다와 마니석은 그들의 소박하지만 진실한 마음을 담은 것이리라.
신장식 교수의 작품은 하늘이 청명하고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흘러내려 비교적 강수량이 풍부한 티베트 고원의 극적 대비를 이루는 색채를 생각하게 만드는 맑고 투명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이 색채는 낙천주의자인 그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은 비포장도로의 그 풋풋한 흙내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룽다에서 볼 수 있는 원색의 펄럭임이 있고, 문명에 찌들지 않은 티베트 사람들의 순박하지만 강인한 삶에 대한 존경이 깔려있다. 글은 자꾸 설명하려 들지만 그림은 즉각적으로 보여준다. 설명이 길어지면 지루하고 긴장이 떨어진다. 문리(文理)를 깨치지 못해 자꾸 만연체를 동원해야 안심이 되는 내 글에 비하자면 그의 작품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여행의 기억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그의 작품은 설명하지 않고도 티베트의 자연과 문화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읽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보는 책을 만들고 싶었던 나의 생각을 실현시켜 주었다. 이 점을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그의 작품이 '바람의 말'처럼 우리 가슴에도 잦아들 수 있기를 바란다.
- 영상 기획기사 2005 · 작가 블로그
〈2005 금강산의 빛〉 신장식 작가 영상 자료 (2005)
신장식 작가가 제작·감독하고 손경환이 편집한 작가 영상 자료 (2005). 금강산 관광이 허가됐던 시기 작가가 직접 답사한 자료들 — 배 타고 출항·현지 버스 이동·등산·금강산 현지 시화전 개최 장면 등 — 이 한데 어우러져 영상화됐다. 음악은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의 〈Best of Mischa Maisky〉 수록곡 '그리운 금강산'.
- 복합 평론 1990 · 최태만
〈창작의 현장〉 잡지 — 최태만 평론 (1990)
신장식의 작업을 지배하는 일관적인 주제는 우리 민족의 의식과 정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낙천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의지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의 작품에서 '아리랑'이란 명제로 드러나고 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구전민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아리랑은 보통 한(恨)의 정서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이란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단순한 후렴구나 의성어만은 아니다.
아리랑은 현실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보다 나은 미래로 넘어가고자 한 민중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예컨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란 노랫말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님을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고개를 넘어가는 주체인 것이다. 이때 이 고개는 모순과 질곡으로 가득 찬 현실을 상징한다. 결국 아리랑은 이러한 모순에 찬 현실을 회피하거나 단념하여 그 속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은 애상과 비극의 정서가 왜곡된 넋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낙천적이고 현실지향적인 콧노래도 아니다. 그 속에는 현실적 삶 속에 항상 나타나는 이러한 정서—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좌절과 떨쳐 일어남, 부정과 긍정, 분노와 용서, 비극적인 것과 낙천적인 것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랑은 노동이란 사회적 실천을 통해 현실의 제 모순을 수용하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 우리 조상들의 변증법적 삶의 자세와 방식을 반영한 미래지향적 의식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장식이 아리랑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이 그 속에 감추어진 이러한 긍정적 세계관이다.
신장식은 목판이 자신이 추구하는 내용과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매체임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그는 나무란 재료가 배타적이지 않고 수용적이란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즉 그의 작품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목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이러한 장점은 원천적으로 그의 낙관적 세계관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너그러움과 자기 긍정의 정신적 넉넉함을 동반한 확신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예술을 지고한 그 무엇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러한 시각은 자칫하면 예술을 비교적(秘敎的)인 신비의 연막 속에 감춰버리거나 난해한 관념이나 이론에 종속시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특별히 전통적인 물건 중에서 미의식과 쓰임새를 다 같이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것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매력은 세계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각, 즉 의식의 건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관련 자료] 판화 작품 제작 중인 신장식 작가 작업 사진 1 (작가 블로그에서 수집 — 〈창작의 현장〉 잡지 1990 게재 추정)](/archive/ar-1990-001/01.jpg)
![[관련 자료] 판화 작품 제작 중인 신장식 작가 작업 사진 2 (작가 블로그에서 수집 — 〈창작의 현장〉 잡지 1990 게재 추정)](/archive/ar-1990-001/02.jpg)
![[관련 자료] 〈창작의 현장〉 잡지 인쇄본 촬영 사진 — 최태만 미술평론가의 신장식 평론 본문 (작가 블로그에서 수집, 디지털 원문 미확보)](/archive/ar-1990-001/03.jpg)
- 글 평론 1989-08-23 · 최태만
〈아리랑 : 자기긍정과 너그러움〉 — 최태만 평론 (1989)
신장식의 작업을 지배하는 일관적인 주제는 우리 민족의 의식과 정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낙천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의지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의 작품에서 〈아리랑〉이란 명제로 드러나고 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구전민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아리랑은 보통 한(恨)의 정서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이란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단순한 후렴구이거나 의성어만은 아니다.
아리랑은 현실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보다 나은 미래로 넘어가고자 한 민중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예컨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란 노랫말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님을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고개를 넘어가는 주체인 것이다. 이때 이 고개는 모순과 질곡으로 가득 찬 현실을 상징한다. 결국 아리랑은 이러한 모순에 찬 현실을 회피하거나 단념하여 그 속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은 애상과 비극의 정서가 왜곡된 넋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낙천적이고 현실지향적인 콧노래도 아니다. 그 속에는 현실적 삶 속에 항상 나타나는 이러한 정서 —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좌절과 떨쳐 일어남, 부정과 긍정, 분노와 용서, 비극적인 것과 낙관적인 것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랑은 노동이란 사회적 실천을 통해 현실의 제모순을 수용하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 우리 조상들의 변증법적 삶의 자세와 방식을 반영한 미래지향적 의식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장식이 아리랑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이 그 속에 감추어진 이러한 긍정적 세계관이다.
그는 아리랑 속에 담겨진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미 작년의 토갤러리에서의 회화전과 제3갤러리에서 가진 판화전을 통해 이와 같은 노력의 한 결과를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아리랑이 담고 있는 복합적인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민화나 무속화, 전통적인 문양이나 시각적 상징물들에 대하여 연구해 왔다. 이러한 전통적인 물건들(청사초롱, 오방위색과 색동, 깃발, 태극과 비천상·연화문 등의 종교적 이미지)은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심미성과 실용성, 상징성을 갖추고 있는데, 그는 이 물건에 내재된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내고 있다.
즉 〈아리랑 — 기원I〉이란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속에 도입되고 있는 전통적인 물건은 그의 긍정적 시각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이 연작은 단순화된 수많은 촛불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이란 표제에서도 드러나거니와 촛불은 정화(淨化)나 염원의 상징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도구란 실제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 구성으로 보아 마치 수많은 불상을 안치해 놓은 사찰의 대웅전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작품은 수많은 촛불이 상단 가운데 부분의 커다란 원을 향해 제각기 조그만 빛을 발산하고 있어 그가 주제로 삼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인 상생(相生)과 통일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소박한 소망들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작은 빛이 모여 이루어낸 광명의 현란함이기도 하다. 이 불꽃의 총화는 고통과 모순(어둠)을 떨치고 일어서려는 건강한 의식의 결합인 것이다.
신장식의 작품이 담지하고 있는 내용은 이러한 건강성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쾌활하고 밝은 색채와 단순명료한 형상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을 판화란 매체에서 성공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으로 목판을 선택했다. 목판은 재료와 기법에 있어서 그의 체질에 잘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두에 둔 내용을 소화하는 데 적절한 것이라는 점을 그는 다양한 종류의 판화를 제작하며 체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소멸법(消滅法)이란 기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목판의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어 목판의 풍부한 맛과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있다. 나무를 깎아내어 찍는 행위의 반복을 거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형상은 수공적인 판화의 매력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즉 그 이미지는 작가의 계획과 의지에 우연적인 효과는 물론 재료 자체가 가진 특성(나뭇결)까지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신장식은 목판이 자신이 추구하는 내용과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매체임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그는 나무란 재료가 배타적이지 않고 수용적이란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즉 그의 작품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목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이러한 장점은 원천적으로 그의 낙관적 세계관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너그러움과 자기긍정의 정신적 넉넉함을 동반한 확신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예술을 지고한 그 무엇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러한 시각은 자칫하면 예술을 비교적(秘敎的)인 신비의 연막 속에 감춰버리거나 난해한 관념이나 이론에 종속시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특별히 전통적인 물건 중에서 미의식과 쓰임새를 다 같이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 속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것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매력은 세계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각, 즉 의식의 건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 복합 평론 1989 · 최태만
〈'전통'의 맥을 찾는 작업〉 — 최태만 평론 (1989)
한국미술에 있어서 전통의 문제
한국미술에 있어서 전통의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미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에 걸쳐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나 혹은 '현대적 재창조'의 문제는 마치 하나의 당위론적 명제인 것처럼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것이 원론적 입장에 서 있을수록 전통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신비롭고 초월적이며 영원불변하는 초논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전통의 문제는 단순하게 '꼭 이러저러한 무엇이어야 한다'는 막연한 관념론이나 명분론으로 환원시켜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의 승계'란 관념적 구호나 유명론에 함몰되어 정작 전통의 풍부한 가능성은 사장한 채 과거의 것을 되새김질하거나 차용에만 그침으로써 오히려 전통 그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것을 복제한다고 해서 전통의 올바른 계승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전통은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필요와 요구, 취향이나 목적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통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자면 전통이란 관습 가운데서 역사적 배경을 가지며 특히 높은 규범적 의의를 지니고 전하여 내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문화적 전통이란 인간이 창조해 낸 가치의 집적물, 즉 물질적 문화와 지적 문화가 상호, 보존적으로 통합된 것으로서 실제적이고 생생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긴 역사를 관류하였던 정신적 가치와 공동체의 삶의 의식에 의해 축적되고 발전해온 인간의 지적·육체적 노동의 결과물이며 나아가 삶의 질을 풍부하게 고양시키는 자산이다. 그러나 교조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전통주의자들은 전통을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보수적이며 고답적인 아카데미즘을 전통으로 위장하며, 절충주의자들은 그것을 정태적인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이것저것 주워담아 변종을 만들어 내는 것을 전통이라고 곡해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허상의 우상을 숭배하고자 하는 의식없는 자세에서 빚어진 결과임과 동시에 실천적 모색은 방기한 채 주관적 관념을 전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서 흔히 빨려들 수 있는 함정이다.
한국미술에 있어서 전통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의 관점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지배계층의 고급 취향과 미의식을 존중하는 입장이 있고 둘째, 우리 민족의 기층사상인 샤머니즘과 음양오행사상·불교·유교·도교 사상에 기초한 기층민중의 미적 전통을 천착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 두 관점은 모두 일단 우리 민족의 자기동일성이 상실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용인하고 있다. 전자가 중국을 통해 수입된 주자학이나 성리학이라는 학문적 기반과 더불어 중국의 화론을 이어받고 있다면 후자는 민족의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을 근간으로 하되 비록 외국에서 도입된 것이지만 토속화한 외래종교를 바탕에 깔고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이른바 80년대의 민족·민중미술 일각에서 앞서 말한 두 관점을 극복하고 민중의 자발적이고 당시대의 필요에 의해 생산된 실용적이고 신명넘치는 미술의 전통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민간신앙적 측면에서의 무속과 점·복·예언, 풍수·참위(讖緯) 등을 위해 쓰여진 각종 도구나 기재 속에 등장하는 미적 표현물과 노동의 고달픔이나 자연의 각종 재해 속에서도 놀이를 통해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던 기층민중들의 놀이판에 쓰여졌던 여러 악기나 도구 속에 나타나고 있는 미적 양식과 취향은 지배계층의 관조적이고 사변적인 것과 다른 것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고급한 지배 계층의 미술전통에 대한 평가와 교육에 비해 절실한 삶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기층 문화의 전통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민화 등의 민속적 예술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고 할지라도 거의 신화적인 맥락에서 숭배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전통을 고착된 것으로 바라보고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에 있는 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때 전통에 대한 논의는 항상 원론적 차원에서 겉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통이 현재에도 유용하며 충분히 생산적이고 실질적인 민족공동체의 자산임을 자각하고 이것을 실천적으로 재생산해 내기 위한 노력이 실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전통의 탐색 그 가능성과 한계
신장식의 작업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우리 것 찾기'이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관행과 제도 속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그에게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학교육기간동안 이른바 현대주의의 각종 규범이나 법칙을 충실하게 학습하였고 또 이러한 것을 좇아 습작시기를 보낸 바 있다. 그러한 그가 전통에 눈을 돌리고 그것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고자 했던 사실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신장식이 전통에 대해 관심을 돌리도록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88서울올림픽〉이다. 그는 올림픽 개·폐회식 행사의 미술부문 실무자로 활동하면서부터 한국의 전통적 미술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착수하게 된다. 당시 그와 함께 이 행사를 준비·진행했던 실무자들은 세계인의 축제한마당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것이 무엇인가 찾아 나서게 되었고 수집된 것을 토대로 개·폐회식 행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1여 년에 걸친 작업과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문헌자료의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문헌에 의한 전통의 연구가 가질 수 있는 결정적 한계는 전통을 일정한 틀로 한정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전통적 맥락에서의 효용성이나 내용적 측면에 대한 고찰 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전통적 대상을 단지 심미적·장식적 차원에서 전치시켜 버리는 것이다. 올림픽 행사에의 참여가 그의 사고와 작업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을 제공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관주도의 지극히 관료적이고 물량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작업의 한계까지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나 올림픽 개·폐회식 행사의 미술담당 실무자로 참여하기 이전부터 신장식은 한국의 전통 문양이나 한국적이라 명명되어지고 있는 여러 이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습작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단지 그것은 말 그대로 모색의 과정이었지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전통에의 탐색이 현대미술의 온갖 현란하고 정치한 논리보다 자신의 체질에 더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전통적 양식이나 내용에 대한 모색자체에만 머물러 있던 단계에서 올림픽이란 거대한 행사를 위해 여러 민족학자의 자문을 구하고 박물관이나 개인연구실을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 일을 진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현재 작업을 끌어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이다.
신장식이 무엇보다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고 이것을 토대로 실제 자신의 작업에 적용한 것은 깃발이다. 기는 '우리 것'을 찾는 과정에서 선택된 것이지만 그가 유달리 이것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은 옛날에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 쓰여졌던 각종 깃발의 도형 자체에서 응축·발산하는 힘과 건강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농업경제가 사회구성체의 핵심이던 농경사회에서 쓰여졌던 농기로부터 군기와 왕의 행차때 쓰여졌던 여러 종류의 깃발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나름대로의 이유와 내용을 가지고 일정한 격식에 의해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거의 유물을 농경사회가 아닌 산업사회, 더 나아가 후기 산업사회라고도 하는 현대에 어떤 방식과 내용적 맥락에서 되새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칫하면 과거에 대한 향수나 회고의 수준에 머물러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깃발을 포함하여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내었던 여러 사각이미지들이 넉넉히 정신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상징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믿음을 작품의 내용 속에 투여하고 있다.
예컨대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중에서 가장 시각적 호소력이 강하면서 다의적인 상징체계들로 구성된 〈아리랑 - 아침〉이란 작품은 그의 믿음이 어디에 기초한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화면 가운데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중심으로 네 방위를 의미하는 청·백·주·현의 색이 자리하고 있고 이것을 전통적인 깃발에 등장하는 화염각(火焰角: 農旗에서는 이러한 양식을 '지네발'이라고도 한다)이 감싸고 있다. 사방위를 상징하는 4가지 색깔과 인간의 상징인 노란색을 '오방색'이라 하는데 이것은 음양오행 사상에 기초한 우주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태양속에 떠오르는 새는 또한 비상하고자 하는 의식의 표현인데 이것의 원형을 그는 고구려 벽화에서 찾고 있다. 즉 선녀가 해를 들고 승천하려는 모습을 그린 벽화에서 그 내용과 형식을 인용한 것이다. 이 작품은 따라서 일출의 장엄함을 그린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새로운 날을 열고자 하는 의지와 힘의 발산을 표현한 것은 고구려 미술에서 중요하게 보여지는 특징이며 또한 조선시대에 제작되었던 〈일월부상도(日月扶桑圖)〉같은 그림에서도 이러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전설적인 성상인 오봉산 위로 솟아오르는 해의 기운은 화염각이 단지 장식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의 발산과 흡수를 상징하는 도상임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깃발이면서도 힘의 상징이며 나아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에의 기원을 의미하는 다층적 의미구조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밝고 명쾌한 색상과 단순명료하면서도 분명한 내용을 담지하고 있는 형식은 단연히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신장식의 작업에 중요한 동인을 제공하는 것이 민화임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어둡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밝고 긍정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면에서 말이다. 그의 깃발 그림 속에는 이러한 민화적 도상뿐만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면서 우주 삼라만상을 제어하는 법칙, 우주만물의 근원인 태극(太極)을 형성하는 곡옥(曲玉)과 벽사(抗邪)의 의미로 그려졌던 닭·방상시의 얼굴 등 주술적이며 민간신앙적인 도상들도 많이 등장한다. 농업경제체제에서 풍요를 희구했던 상징적 악기인 도(寞)와 은율사자놀이의 사자를 해학적으로 재구성한 〈탈〉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보이는 넉넉하고 긍정적인 시각은 고통과 고뇌에 의해 산출된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재미를 느끼게 만든다. 또한 그것이 단순히 흥미있는 것에만 끝나지 않고 보다 의미있는 내용까지 유추하게 만든다는 데서 그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현실에의 비판은 숨겨진 방식, 즉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다만 그의 작품이 도해적인 면을 너무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의도한 내용을 온전하고 입체적으로 구현하지 못한 채 평면적이고 설명적으로 나열해 놓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점은 깃발을 평면으로부터 약간 돌출시키고 그 배경을 이루는 화면을 현대적 감각의 드로잉으로 처리한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연필 드로잉의 배경이나 장식적인 면이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나뭇가지의 첨가 등은 다소간 절충적인 한계까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러한 도상이 산업사회란 이 현대사회적 삶 속에서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이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므로 지금 당장 명쾌한 결론을 기대할 수는 없다. 단지 현대미술의 저 광활한 대지속에서 자칫 망각해 버리기 십상인 우리의 토양과 체질을 무엇인가를 반성하고 그것을 다시금 발육시키고자 하는 의욕이 얼마나 발전된 종묘법을 찾아내고 우리의 풍토와 환경에 맞는 결과물을 재생해 낼 수 있는가 다같이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관련 자료] 신장식 작가의 1989년 깃발 작품 4점이 콘크리트 바닥에 펼쳐진 모습 — 호랑이·꽃 도상 등 민화·민속적 모티프 깃발 회화 시리즈 (작가 블로그에서 수집)](/archive/ar-1989-008/0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