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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1989-08-23

〈아리랑 : 자기긍정과 너그러움〉 — 최태만 평론 (1989)

관련 작품 (5점)
다룬 전시
〈아리랑〉 포스터
〈아리랑〉
기간
1989-08-23 — 1990-06-23
장소
제3갤러리 (한국, 1989.8.23–8.29) / ON GALLERY (일본 오사카, 1990.6.18–6.23)

요약

미술평론가 최태만이 1989년 신장식 판화전 〈아리랑〉에 부쳐 쓴 비평문. 아리랑이 단순한 '한(恨)'의 정서가 아닌,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미래지향적 의식의 표상임을 분석하고, 청사초롱·촛불·태극 등 전통적 상징물을 신장식이 어떻게 자신의 낙관적 세계관과 결합하여 새롭게 해석해내는지 — 특히 소멸법(消滅法) 목판 기법을 통한 표현의 가능성을 짚는다.

정보
출처
작가 블로그
저자
최태만 (미술평론가)

본문

〈아리랑 : 자기긍정과 너그러움〉

최태만 (미술평론가) · 1989-08-23

신장식의 작업을 지배하는 일관적인 주제는 우리 민족의 의식과 정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낙천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의지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의 작품에서 〈아리랑〉이란 명제로 드러나고 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구전민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아리랑은 보통 한(恨)의 정서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이란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단순한 후렴구이거나 의성어만은 아니다.

아리랑은 현실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보다 나은 미래로 넘어가고자 한 민중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예컨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란 노랫말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님을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고개를 넘어가는 주체인 것이다. 이때 이 고개는 모순과 질곡으로 가득 찬 현실을 상징한다. 결국 아리랑은 이러한 모순에 찬 현실을 회피하거나 단념하여 그 속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은 애상과 비극의 정서가 왜곡된 넋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낙천적이고 현실지향적인 콧노래도 아니다. 그 속에는 현실적 삶 속에 항상 나타나는 이러한 정서 —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좌절과 떨쳐 일어남, 부정과 긍정, 분노와 용서, 비극적인 것과 낙관적인 것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랑은 노동이란 사회적 실천을 통해 현실의 제모순을 수용하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 우리 조상들의 변증법적 삶의 자세와 방식을 반영한 미래지향적 의식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장식이 아리랑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이 그 속에 감추어진 이러한 긍정적 세계관이다.

그는 아리랑 속에 담겨진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미 작년의 토갤러리에서의 회화전과 제3갤러리에서 가진 판화전을 통해 이와 같은 노력의 한 결과를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아리랑이 담고 있는 복합적인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민화나 무속화, 전통적인 문양이나 시각적 상징물들에 대하여 연구해 왔다. 이러한 전통적인 물건들(청사초롱, 오방위색과 색동, 깃발, 태극과 비천상·연화문 등의 종교적 이미지)은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심미성과 실용성, 상징성을 갖추고 있는데, 그는 이 물건에 내재된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내고 있다.

즉 〈아리랑 — 기원I〉이란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속에 도입되고 있는 전통적인 물건은 그의 긍정적 시각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이 연작은 단순화된 수많은 촛불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이란 표제에서도 드러나거니와 촛불은 정화(淨化)나 염원의 상징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도구란 실제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 구성으로 보아 마치 수많은 불상을 안치해 놓은 사찰의 대웅전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작품은 수많은 촛불이 상단 가운데 부분의 커다란 원을 향해 제각기 조그만 빛을 발산하고 있어 그가 주제로 삼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인 상생(相生)과 통일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소박한 소망들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작은 빛이 모여 이루어낸 광명의 현란함이기도 하다. 이 불꽃의 총화는 고통과 모순(어둠)을 떨치고 일어서려는 건강한 의식의 결합인 것이다.

신장식의 작품이 담지하고 있는 내용은 이러한 건강성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쾌활하고 밝은 색채와 단순명료한 형상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을 판화란 매체에서 성공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으로 목판을 선택했다. 목판은 재료와 기법에 있어서 그의 체질에 잘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두에 둔 내용을 소화하는 데 적절한 것이라는 점을 그는 다양한 종류의 판화를 제작하며 체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소멸법(消滅法)이란 기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목판의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어 목판의 풍부한 맛과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있다. 나무를 깎아내어 찍는 행위의 반복을 거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형상은 수공적인 판화의 매력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즉 그 이미지는 작가의 계획과 의지에 우연적인 효과는 물론 재료 자체가 가진 특성(나뭇결)까지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신장식은 목판이 자신이 추구하는 내용과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매체임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그는 나무란 재료가 배타적이지 않고 수용적이란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즉 그의 작품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목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이러한 장점은 원천적으로 그의 낙관적 세계관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너그러움과 자기긍정의 정신적 넉넉함을 동반한 확신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예술을 지고한 그 무엇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러한 시각은 자칫하면 예술을 비교적(秘敎的)인 신비의 연막 속에 감춰버리거나 난해한 관념이나 이론에 종속시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특별히 전통적인 물건 중에서 미의식과 쓰임새를 다 같이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 속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것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매력은 세계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각, 즉 의식의 건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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