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Geumgang from Baekdu-daegan
2003 · 454×181 cm · Korean Paper, Acrylic on Canvas
Shin Jang-sik 〈10 Years of Longing for Mt. Geumgang〉 — Installation Views (2003)
Installation views of Shin Jang-sik's solo exhibition 〈10 Years of Longing for Mt. Geumgang〉, held at Savina Museum of Contemporary Art in November 2003. The set documents both the paintings — a survey of the artist's ten-year Mt. Geumgang practice since 1993 — and the accompanying 〈10 Years of Longing, Mt. Geumgang — Video Installation〉 (video and installation, 700×600×30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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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xt Review 2003 · 김준기
"10 Years of Longing for Mt. Geumgang" — Kim Joonki Critique (c. 2003)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열 번 정도 해가 바뀌면 세월의 때가 묻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경계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예술가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동안 꾸준히 파고든다는 것은 그 세월의 길이 만큼의 가치를 두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장식 개인의 작품세계 맥락 안에서 보자면 이번 전시는 지난 10년동안 금강산을 그려온 그의 변천사를 일별해보는 자리라는 점에서 여느 때와는 다른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가의 마흔 전후 작품세계를 분별해 굵직한 흔적을 읽어내는 자리인 것이다.
신장식의 금강산 그림 10년의 변천을 되돌아보는 일은 개인의 예술적 여정을 살펴보는 일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단의 땅이었던 금강산의 바닷길이 열린 것도 벌써 5년이 지난 일이다. 이제는 땅길까지 이어졌으니 이런 격변의 과정은 앞으로 더욱더 시간차를 좁히며 우리곁에 다가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0년전부터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한 신장식은 예술가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예지력을 가진 작가로 꼽을 만하다. 금강산의 회화적인 맥락 뿐만 아니라 그 문화정치적 무게에 비추어보면 냉엄한 분단현실과 직면한 이 시대의 화가가 그려낸 '10년의 그리움'은 그 해석의 지평이 훨씬 넓게 열릴 수 있다.
돌이켜보면 21세기 초엽인 지금 금강산을 그린다는 사실 이면에 깔린 한국 현대사의 암울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이었다. 특히 분단상황에서 벌어진 비상식과 억압이 어디 한두가지였겠는가. 그 어두움을 깨쳐나가기 시작하던 1980년대 말의 통일운동 혹은 남북관계를 생각해보면 그저 아득한 먼 옛이야기 같기만 하다. 1988년과 1989년 여름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당시 각각 6.10과 8.15를 계기로 통일운동을 벌였던 전대협 시절의 학생운동은 연와(連臥)투쟁이라는 방식까지 동원해가며 폭넓게 통일논의를 불러일으켰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이 막힌 학생들이 뜨거운 아스팔트 길에 인간사슬을 이뤄 드러눕는 비상한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문익환, 임수경 등의 방북으로 이어진 일련의 통일운동은 통일논의 자체를 불온시했던 억압적인 상황을 깨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 금강산 육로관광이나 수백명의 평양방문단 뉴스를 접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이런 일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딴나라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스팔트에 드러누워 한 명씩 차례로 인간사슬의 한 고리씩이 뜯겨져 나가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차라리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 시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중에 대단히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다. 수만명이 그야말로 스타일리쉬하게 팔을 내뻗으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의 구호를 외치거나, 비장하고 일사분란하게 쟁가를 부르며 결연하게 통일을 이야기하던 때였다. 당시 여고생들의 얼짱이었던 임종석 전대협의장의 화려한 대중연설이나 지금은 영화배우를 하고 있는 김중기 학형의 뜨거운 눈물은 그시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기호들이다. 이런 격렬하고 진중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축제를 벌이듯 동심으로 돌아가 유쾌하게 부르던 노래가 있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막연하고 아득하기만 하던 통일 이야기를 친숙하게 풀어내는 일종의 대중친화적인 이벤트였다. 이렇듯 비장함 속에서도 일각의 낭만적 감성으로 자리잡았던 금강산을 찾아가는 일이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관광상품으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신장식의 금강산 그림은 이렇듯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재편되고 있는 정치사회적 변동 과정을 관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신장식 읽기의 초점을 회화적 관심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연계된 미술의 자리매김'이라는 관점으로 넓혀 보고자 한다. 애초에 그의 금강산그림은 회화적 여정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중대 사안이다. 생동감과 신명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담아내는 하나의 텍스트로서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금강산이어도 좋고 백두산이나 지리산, 한라산이어도 무방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언급한 이런 산들은 이미 많은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풍경으로 자리잡아왔다는 점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신장식은 전통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소재들을 중심으로 전개하던 회화적 항로를 금강산으로 정리해 나갔다. 십년전에 시작된 이 일은 회화적 가치로서의 금강산 그림에 대한 연구를 동반한 것이었다. 당시의 그림들은 관념적인 산수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실체와 형상 사이의 연관성이 희박했으므로 주변의 의아한 시선을 받았을 법하다. 이런 점을 넘어서려는 작가의 노력은 금강산 옛그림들에 대한 연구와 사진자료의 수집 등으로 나타났지만 현장을 체험하지 않은 풍경화란 어쩔 수 없이 가슴 속의 그림이 아닌 머리 속의 그림일 가능성이 높았다. 체험을 통한 감성적 경험을 풀어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자기 지시적인 모더니즘 미술의 언명에 따라 회화성을 높이는 몇 가지 장치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재로 그의 1990년대 중반 작품에는 이런 추정을 예시하는 장치들이 적절히 공존하고 있다. 당시의 금강산 그림들은 촛불이나 격자무늬가 그려진 좌우대칭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시각 장치물에 불과했다. 온전히 산의 풍경만을 담은 것이라 할지라도 화면에 부착된 볼트-너트나 십자모양의 반복되는 기호들과 공존하고 있었으며 자유분방한 뿌리기 기법 속에 가려진 풍경이었다. 어슴프레하게 넘어가는 색면과 두루뭉실한 윤곽의 금강산 그림들은 구체성을 담지 않은 시각 기호 그 자체였다.
그가 금강산을 최초로 그린 것은 1993년이었고,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기 전까지 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금강산을 주제로 열었다. 이 가운데 1996년의 개인전 도록에 실린 담배를 피워물고 먼산을 바라보는 작가의 흑백 사진은 관념산수와 진경산수 사이의 명확한 갈림길에 서있는 자신의 위치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분단상황을 보여주는 휴전선 철책 앞에 서 있는 한 화가의 모습은 마치 조만간 저 철책선을 넘어서 금강산으로 갈 것을 염원하거나 혹은 예감한 듯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요컨대 당시의 신장식의 금강산은 회화적 목표에 압도되어 기의를 유보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지만, 재현적 회화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자폐적인 형식주의 모더니즘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금강산을 그리되 회화적 장치 속에 묻어둔 금강산으로 전용하면서도 그 장치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후의 작업들을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금강산 그림으로 끌고나갈 가능성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금강산 그림들에 대해 미술평론가 심상용은 신장식식 금강산 그림이 금강산의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평면으로의 복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읽어 냈다. 이렇듯 관념적인 기호로서의 소재들 가운데 하나였던 금강산의 의미는 시사평론가 유시민이 과감하게 언급한 '신장식에게 있어 금강산은 미학적 소통의 도구일 뿐'이라는 말 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술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꿈틀거리며 생동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신장식과 금강산은 관념적인 시각적 기호 이상의 것으로 전환하면서 점점 더 실체와의 구체적인 결합정도를 높여 온 것 같다.
금강산 방문 이후의 금강산 그림은 여러모로 그 이전과 다르다. 우선 관념산수를 진경산수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최근의 작업들은 작가가 직접 금강산을 찾아 사생을 하고 사진을 남겨 온 결과물을 토대로 제작한 금강산 진경 작업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념에서 진경으로의 전환'은 '실경과 그림 사이의 합일점'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실경 이전부터 금강산을 그려오면서 나름의 독특한 조형어법을 만들어왔는데 이것이 진경회화와 접점을 이루면서 새로운 경지의 미적 전유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금강산을 하나의 상징으로 차용하면서 금강산 그림을 시작했으며, 금강산을 통해 희망과 생동감을 얘기해왔다. 그는 금강산 그림을 그리기 이전부터 아리랑 연작을 통해서 전통의 가치와 미감을 현대미술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그의 전통의 재해석은 광화문, 근정전이나 청사초롱의 이미지 등에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조형적 방법의 변주를 다양하게 구사하던 그에게 금강산은 단순한 풍경 이상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작들에서 보이는 회화적 변화들은 무엇보다도 신장식 특유의 뿌리기 기법을 줄이고 붓질의 묘미를 살려나간다는 데 있다. 화면을 채운 형상 위에 뿌리고 다시 형상을 잡은 후 다시 뿌리기를 반복했던 전형적인 그리기 방식에 비해, 최근작들은 바위와 나무 등을 그려낸 붓질 자체의 맛을 살리면서 뿌리기를 절제하거나 아예 가미하지 않은 그림들도 있다. 가히 '유화붓 준법'이라 이름할만한 신장식의 붓질 실험인 것이다. 종이와 먹과 모필을 가지고 일필휘지하던 옛그림의 방식을 생각해보면 캔버스위에 한지를 붙이고 그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뻣뻣한 유화붓의 필치를 남겨둔 이 그림들은 각별한 관심의 대상일 수 있다. 수채화처럼 얕게 그린 이 풍경화들은 금강산을 드나들면서 실경사생을 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긴 결과로 보인다. 발색이 강한 청색안료로 그린 윤곽선들과 점묘들은 뿌리기에 비견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신작들이 전통 수묵채색화의 장점을 일부 끌어내고 있다는 점 또한 아주 흥미롭다. 맥의 흐름에 의거해서 산의 형상을 그려내고 골짜기를 여백의 방법으로 비워둔 사실적 그리기 법으로서의 유효성을 끄집어낸 것이다.
색면을 중심으로 분할되던 화면이 훨씬 사실적 그리기에 가까워졌다는 것 또한 이전과 다른 점이다. 색면의 요소들보다 점과 선의 요소들이 많아진 것이다. 뿌리기 방식에 비해 점묘와 선묘를 살려둔 것은 관념으로 금강산을 그리면서 관념성의 이면을 자기 지시적인 회화성으로 보완하려했던 이전의 것들과 확실히 변별되는 점이 있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대상물이 스스로 경험한 세계라는 사실은 그 생생한 경험을 토대로 한 자신감 넘치는 그리기로 이어졌다. 이런 점은 〈금강산 만물상 - 1998.11.21〉이라는 5미터짜리 기념비적인 대작에서 완연하게 드러난다. 실체에 근거를 두고 그린 그림들은 이렇게 화가의 손길을 이전과 다른 차원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4.5미터에 달하는 큰 그림 〈금강산에서 바라본 백두대간〉의 경우, 광각 렌즈로도 포착할 수 없는 대관산수를 여러장의 사진을 합성해서 컴퓨터로 보정한 후에 그것을 밑그림에 활용한 점을 보면 작가는 형태의 왜곡을 최대한 줄이고 사실적 표현에 근거해서 진경에 다가서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역으로 작가가 관찰한 금강산과 백두대간이라는 대상물에 대한 시각적인 관심과 더불어 이 땅의 기(氣)를 읽어내려는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그림의 대상인 산 자체의 모습을 어떻게 화면위로 끌어들일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결국 관념적 기호 또는 소재로서의 금강산을 실경 금강산으로 대체했을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일 것이다.
금강산을 매개로 생동하는 자연과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 나아가 분단상황을 비롯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당대성과 현장성의 전취 과정은 신장식 그림이 포기할 수 없는 남다른 가능성이다. 이것은 상징과 실체의 합일을 통해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진정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나름의 독특한 조형어법과 금강산이라는 실체의 만남은 또 다른 차원의 예술적 완숙을 이끌어내고 있다. 신장식은 금강산을 하나의 상징으로 접근했다가 그 실체를 만났다. 산을 그리되 산을 그대로 옮겨 그리는 이른바 재현산수 작업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현대미술가' 신장식의 최대 과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 틀을 벗어나서 금강산의 실체를 읽어내는 데로 나아가고자 했다.
예술은 삶의 흔적이 아니던가. 예술가적 삶의 부산물이자 증거물로 예술 작품은 두고두고 그 시각적 물건을 만들어낸 작가의 존재와 운명을 같이한다. 지난 10년간 신장식은 혁신적인 조형실험을 통해 작가로서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보다는 자신의 조형어법이 담겨있는 좋은 그릇을 만들어 두고 그 그릇에 맞는 맑은 물을 찾아서 꾸준히 한 길을 매진해 왔다. 그 길에 대해 작가는 '작은 진정성이라도 있다면 부끄러움이 덜할 것 같다'는 말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20세기를 호령해왔던 예술의 자율성은 이제 그것만으로 독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작가 신장식의 작업들은 분단의 현실 아래서도 새로운 만남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통의 미학으로 지평을 넓혀왔다는 점에서 더 넓은 앞길을 든든하게 열어둔 셈이다.
- Text Review 2004-01-02 · 이지호
Mt. Geumgang Seen Between Sashil (Realism) and Sa-eui (Idealism) (2004)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화가는 풍경에 대한 자신의 호감을 그림으로 그리고, 작가는 글로 표현하여 자연을 환기시켜 알게 한다. 풍경을 그리는 방법은 두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첫째 풍경 그 자체에서 오는 느낌을 그대로 재현 하거나 묘사 하는 것이고, 둘째는 작가의 사고에 따라 유추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묘사에는 확실한 것이 없고, 예술가의 선택에 따라 늘 바뀐다. 신장식은 사계절마다 그 모습을 달리하는 금강산의 풍부한 표정을 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금강산을 가기 전 그가 소재로 한 금강산 그림은 역사적인 상징물로서 금강산의 의미를 환기하려했다. 그러나 금강산을 직접 다녀온 후로 자연의 경이로움에 압도된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이 색채와 형태를 통해 드러나면서 표현주의적 양식도 강해졌다.
금강산은 분단 50년 만인 1998년 11월 남한의 주민들에게 북한관광지로서는 최초로 개방되었다. 태백산맥 줄기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금강산은 최고봉인 비로봉(1638m)을 중심으로 1만 2000봉우리가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봉우리로 펼쳐져있다. 금강산은 그 수려한 아름다움 뿐 아니라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은 곳이기에 단순한 풍경 이상의 것이다. 화가 신장식에게 금강산은 역사적인 의미 외에도 또 다른 절실함이 묻어 있는 곳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이 금강산에서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실경으로 사생하면서 부터 우리의 미학이 세워졌기에 이곳을 바로 우리 회화사의 '성소'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 성스러운 곳에서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회화의 전통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소재가 금강산인 것이다.
관념의 금강산에서 진경의 금강산으로 작가가 금강산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1993년으로 1998년 금강산 관광 이전까지 5년간 7회에 걸친 〈금강산〉작업에서 회화와 설치 판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작업하였다. 이 당시 작가는 미술자료나 사회학적인 문헌에 의존하거나 혹은 상상과 관념으로 금강산을 그렸다고 본다. 1998년 금강산에 갈 수 있게 되자 최초의 배를 타고 그 현장을 방문한 후 금강산의 사계를 두루 여행하였다. 그가 금강산과 같은 한국적인 소재에 관심을 가진 연유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서 미술조감독으로 일하게 되면서부터다. 이러한 경험을 시작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민속적 소재 속에 숨은 조형언어에 관심을 갖고 청사초롱, 북, 징, 깃발, 경복궁 등의 소재를 활용하여 〈아리랑〉이라는 테마로 작업을 하였다. 그 이후에는 우리 산하에 스며있는 생동감과 생명력을 맨드라미, 들풀, 소나무, 북한산 등을 소재로 그려냈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그려진 금강산은 〈아리랑〉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대중의 현실과 일상을 드러내는 소재였다.
작가는 금강산에 발을 디디고, 그것을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호흡하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눈앞에 펼쳐진 금강산의 아름다운 실제 경관을 스케치나 사진기에 담아왔다. 이제 관념 속에 존재하던 금강산이 작품에서 실경으로 또다시 진경으로 이어진 것이다. 신장식은 세 번에 걸쳐 금강산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러나 금강산의 실경에 근거하고, 한국화에서의 평면성, 장식성과 같은 표현방식을 일부 차용해왔다고 실경산수라 이름붙이기에는 서양의 풍경화적인 요소를 간과할 수는 없다. 그의 금강산은 자연을 그리고 그 자연에 대한 작가의 느낌과 생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낭만주의적 풍경화로 볼 수 있다.
화가들은 자연의 거대한 힘이나 규모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숭고'라 부른다. 서양의 고전주의 풍경화에서 자연은 현실의 대상이며 인간은 그것을 파악하고 사용하는 주체라는 자연관이 담겨 있다. 그리고 터너의 낭만주의 풍경화는 회화적인 것과 숭고한 것을 그리면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자연이 작고 유한한 인간을 구원해주리라는 희망을 드러냈다. 자연과 같은 예술을 모색하며 부드럽고 따스한 자연을 그려나간 바르비종파의 풍경화에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가 깃들어 있다. 신장식의 금강산은 유교사상이나 도가사상과 같은 자연에 순응하는 동양적 정신세계의 표출과 한민족의 뼈아픈 분단의 현대사를 드러내 예술적으로 재현하여 희망을 제시하는 의도에서 작가가 느끼고 작가가 만들어낸 '생동과 신명'의 산이다. 그의 풍경화에는 자연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작가의 느낌과 생각이 함께 담겨 있으므로 금강산은 그를 통해 풍경이 되는 것이다.
신장식의 작품 제작과정은 기억과 경험에만 의지하기보다는 객관적인 재료에 근거한다. 우선 그는 실경에 가까운 이미지를 얻기 위하여 금강산을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기로 촬영한다. 그렇게 얻어진 사진들을 컴퓨터의 포토샵에서 잘 다듬어서 이를 다시 캔버스 화면 위에 빔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투사한다. 여러 번에 걸친 이미지 선택과 표현에서 실경 특유의 현장감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캔버스위에 한지를 발라 표면을 두텁게 하여 마티에르의 느낌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지로 된 화면 위에 비춘 금강산의 모습을 얇게 혹은 두껍게, 진하게 혹은 흐리게 아크릴릭 물감으로 채색한다. 색의 표현방법으로는 금강산의 곡선은 짙은 색으로, 골짜기는 밝은 색으로 동양사상적 관점에서 양기와 음기의 적절한 조화와 만남을 추구한다. 이에 금강산의 생동감을 더하기 위하여 그려진 화면 위에 물감을 뿌리기도 하고, 쇳가루를 섞어서 가을 단풍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특히 그의 화면에서 주조색인 청(靑)색은 오행 가운데 목(木)으로서 동쪽에 해당하고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으로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하며,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색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색은 오방색이다. 이것은 한국의 전통색으로 중국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근원을 두고 있다. 작가는 색을 시각적 체험으로의 반응보다는 관념화되고 지식화된 우리의 전통적인 색채에서 구체적인 형상과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으로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서구적인 원근법과 명암법에서 벗어난 화면이 색채와 이미지가 어우러져 서정미 넘치고 장식적인 화려함까지 보여주게 한다.
표현주의적으로 승화된 금강산수
작품 〈금강산 천화대〉는 빛과 그림자의 강한 대비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전경과 푸른 산 너머 멀리 하얀 산이 보이는 것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현대미술의 문을 연 폴 세잔의 흰색 산 〈생 빅투아르 산(Mt. Sainte Victoire)〉을 떠오르게 한다. 금강산이 신장식의 마음의 성소라면 석회석으로 된 하얀 '생 빅투아르'산은 세잔의 고향이다. 세잔은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리고 또 그렸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자연은 그 깊이로 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빛의 변화에 따른 색감에 주관성을 표현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념과는 표현형식을 달리하면서 새로운 풍경화를 탄생시켰다. 그는 산의 형태에서 자신의 주관성을 깊이 드러내면서 객관적인 사실주의와 주관적인 감각의 표현으로 나아간 것이다. 신장식도 금강산을 그리고 또 그린다. 그는 금강산의 순수한 자연 형체를 단순히 눈에 비치는 형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 형을 중심으로 회화적인 구도가 만들어지는 작가 자신만의 감각적인 형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장식의 금강산은 구체적인 사물의 묘사나 자유분방한 색채를 사용한 감각적인 화면처럼 보일지라도 화면에서 풍기는 전체적인 느낌은 동양화의 채색화와 같이 담백하고 시원한 기운이다. 이는 작가가 객관적인 대상에 충실하고 이의 표현을 위하여 서구적 조형방식은 물론 음기와 양기의 굴곡선 같은 한국적인 전통 화법도 두루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금강산 구룡대 소나무〉는 푸른 소나무의 자연스러움을 의도적으로 기교 부리지 않고 대상에 충실하게 그리고 감정에 정직하게 그리면서도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을 더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의 소나무에서 느껴지는 문인화적 정신이 표현주의적인 요소와 조화되어 승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장식의 454×181cm의 대작 〈금강산에서 바라본 백두대간〉에서 해안선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금강산의 경치는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한다. 금강산 지도 위에 하얀 은하수를 펼친 듯 이어지는 흰 산봉우리의 곡선을 보더라도 그는 이념보다는 자연이라는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주제를 찾아 과거의 형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실험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전통과 현대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의 대담함은 산봉우리의 명암과 색채의 극한 대비, 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 운동감으로 가득한 극적 구도는 인간과 자연의 융합을 감정으로 표현했던 17세기 화가 들라크루아를 연상시키고 동시에 겸재의 아름다운 실경 사생화를 떠올린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고,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기능도 아니다. 우리는 신장식의 금강산을, 한국적인 전통을 현대에 접목하려는 시도 정도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다원화된 문화의 새로운 형태로 우러나는 감성에 공감해야 한다. 그의 풍경화는 실경과 유추사이를 비켜가고 있고, 사실(寫實)적인 표현과 사의(寫意)적인 표현의 사이를 드러내고 있다.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장식의 말처럼 금강산 그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금강산의 감동을 화면에 기록하려는 의욕에서 벗어나 금강산을 진정으로 경험하고 체득한 자로서의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 Text Review 2005-07-01 · 유시민
"The Joy of Having a Painter Friend, Shin Jang-sik, the Aesthetics of His Communication" — Yoo Si-min Critique (2005)
널리 퍼진 선입견에 따르면 예술가는 보통사람들과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화가는 그 가운데서도 유달리 '난해한 괴짜'로 통한다. 이런 선입견이 얼마나 진실과 일치하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나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전혀 근거 없는 편견만은 아닌 듯하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일하는 곳의 풍경이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업실은 책이 가득 꽂힌 고풍스런 서가(書架)와 원고지가 어지럽게 널린 책상을 떠올리게 한다. 피아니스트의 연습공간은 윤기가 흐르는 악기와 감미로운 소리, 길고 우아한 손놀림 같은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화가의 작업공간은 철물 건축자재를 취급하는 문래동 뒷골목의 이른바 '마찌꼬바'와 비슷하다. 캔버스와 작업도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익숙지 않은 방문객은 걸음 떼기가 겁이 난다. 작업실의 주인이 애주당원(愛酒黨員)이라면 담배꽁초가 들어앉은 빈 술병도 한 몫을 한다. 그가 가난한 '무명화가'인 경우에는 틀림없이 바닥에 찌꺼기가 말라붙은 컵라면 용기도 굴러다닐 것이다. 화랑에 내걸린 작품과 달리, 화가의 작업실에서 '예술의 향기'를 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지금껏 겪어본 화가의 작업공간은 이런 곳이었다.
화가 그 자신도 작업공간에 뒤지지 않는다. 여름밤을 꼬박 새며 일을 한 미술 선생님이 윗통을 벗어제친 채 박카스 병을 입에 물고 스트레칭을 하는 광경을 나는 학창시절 학교 미술실 복도에서 본 적이 있다. 요즘 말로 해서 그야말로 '엽기'였다. 저마다 특징이 있겠지만 내가 본 '그림하는 사람들'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종의 문제'에 저마다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문제인지는 열심히 귀동냥을 해 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끝내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작업실'에서 '그런 사람들'이 만든 것이니 만큼, 작품 역시 만만치가 않다. 방학숙제용 팜플렛을 모으기 위해 전시장을 처음 기웃거렸던 시절 이후 지금까지, 나는 미술작품 앞에 서면 품위를 지키는 위선자가 된다. 예컨대 나는 그게 '넓은 벽에 붙어 앉은 파리'를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함께 간 친구는 '바닥에 뱉어놓은 수박 씨' 그림이라고 주장한 작품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무슨 그림이 이 따위람!', 불평을 하면서도 최소한 2분 정도는 그 작품 앞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서 있었다. 작품 그 자체에 몰입하기보다는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예술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는 속물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의 그림 감상법이었던 것이다. 아, 교양인의 길은 정녕 험하기도 하여라!
그런데 이건 사실 나 혼자 책임져야 할 사태는 아니다. 경제학을 전공한답시고 밤낮 미적분 공식과 통계수치를 붙잡고 씨름하느라 예술의 향기를 맡을 기회가 적기는 했지만, 만약 화가들이 부지런히 말을 걸어 주었다면, 그리하여 예술 세계 안의 화가들과 울타리 너머에서 곁눈질을 하는 보통사람들 사이에 폭 넓고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면, 그런 나도 미술 작품을 전시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일을 오늘날처럼 겁내지는 않게 되었을 것 아니겠는가.
앞서 말한 바 '널리 퍼진 편견'에 비추어보면 신장식은 무척 예외적인 존재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기의 직업세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지 논리적으로는 온전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에도 나는 작품과 표정과 어조를 통해서 그가 울타리 너머로 내보내려 하는 미적 감각과 취향과 메시지를 어느 정도 '나름대로'는 짐작할 수가 있다. 이것은 신장식이 '화가에 대한 널리 퍼진 편견'이 무색하게도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술 세계 울타리 밖의 문외한'들과 별 문제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미학적 코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장점이 될지 치명적 약점이 될지 모르겠으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렇다.
단언컨대, 신장식은 남다른 '소통(疏通)의 능력'을 가진 예술가다. 그는 일찍이 학생 시절부터 이런 능력을 발휘했다. 1970년대 중반에 심인(心印)이라는 묘한 이름을 가진 대구의 한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의 동기생들은 신장식이 만든 괴이한 연하장을 몇 장씩은 구입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회탈, 용, 연화무늬, 초가집, 이중섭을 흉내낸 아이들 모습 따위가 등장하는 '신장식표 연하장'은 낮은 가격과 높은 '예술적 품격'에 힘입어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 이 '미술 대중화 사업' 덕분에 그는 겨울방학 때마다 탁탁한 창작활동 자금을 챙기곤 했다.
부자 부모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던 신장식에게 연하장 사업은 중요한 '보급투쟁 루트'였다. 그는 이 자금으로 유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물건을 조달했다. 그리하여 예술적 재능과 물질적 인프라를 모두 갖추게 된 신장식은 5백여 명의 고교 동기생 가운데 유화를 그리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2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나이가 어려 출품자격이 없었던 신장식이 형의 이름을 도용하여 경북도전에 이렇게 그린 유화를 냈다. 그런데 큰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입상을 해버렸다. 그는 이 비밀을 은밀하게 '소통'시켰고, 그 은밀한 소통의 그물에 들어와 있던 친구들은 떼를 지어 전시회장으로 달려갔다. 탁자 위에 도자기와 사과, 모과 따위가 널려 있는 그런 그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장식은 '예술세계 밖의 문외한'들과 수없이 많은 '소통'을 했는데,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던 '소통'은 1977년 봄 대구 시내 어느 독서실 복도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미술대학 진학에 대한 집안의 반대였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미대를 포기할 경우 그가 택할 곳은 경북대학교 상과대학이 유력했다. 신장식은 친구들의 강력한 지원과 격려를 등에 업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결국 미대에 진학했다. 그때 신장식이 화가로 성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뜻을 세우기를 권했던 친구들 가운데 예술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결국 회계사, 변호사, 회사원, 대학교수, 프리랜서 평론가 따위의 직업을 가지게 된 친구들이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소통의 능력' 덕분이었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신장식은 지금, 은행 지점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앉아 신규 발행 고액 수표에 도장을 찍으면서, 날마다 25년 전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를 잘 만나는 것, 예술가의 인생에서도 이보다 큰 행운은 드물다!
88년도 무렵부터 신장식은 어릴 적 외갓집 동네 서낭당에서 본 적이 있는 것과 비슷한 깃발과 청사초롱, 연화무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전통 문양을 그리더니, 나중에는 같은 것을 판화로 찍었다. 그 다음에는 북한산과 광화문을 그렸다. 최근 몇 년 동안 죽어라고 금강산만 그리고 있다. '우리 것' '전통' '역사성' ... 미술평론가들은 그의 작업을 이런 개념을 통해서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신장식이 민족전통을 특별히 숭상하는 내셔널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나는, 그런 개념만으로는 신장식이 그런 것들을 그리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전통문양과 청사초롱, 경복궁, 북한산과 금강산은 그가 시도하는 '소통'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신장식은 아들 딸을 하나씩 둔 평범한 아버지요, 그와 하루가 멀다하고 데이트를 하던 시절에는 분명 그림을 그렸던 여인과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는, 매우 성실한 남편이다. 아무 특별한 정치적 성향도 그 어떤 괴팍한 습관도 없는 '너무나 정상적인 중년남자'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일상을 전혀 시끄럽지 않게 엮어나간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조용히 경청할 때와 적절히 자기 주장을 할 때를 균형 있게 판단한다. 예술을 그 무엇인가에 종속시키는 어리석음도 저지르지 않지만 그것을 역사에서 완전히 분리하는 정반대의 오류에도 빠지지 않는다. 신장식은 한 마디로 말해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전한 시민'으로서, 동시대인과의 폭넓은 '미학적 정서적 소통'을 추구하는 화가인 것이다.
진정 빼어난 예술가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엇'을 창조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상상을 넘어서는 기행(奇行)이나 면벽(面壁)의 절대고독을 거쳐 잉태될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끊임없는 소통(疏通)의 산물일 수도 있다. 신장식은 기행이나 면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건전한, 너무나 건전한 시민'이기에, 나는 그가 지금까지 그렸던, 그리고 앞으로 그리게 될 작품들이 모두 가족과 친구, 이웃과 동시대인, 그리고 역사와 함께 나누었던 깊고 넓은 '소통'의 산물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에는 믿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따른다. 나는 신장식의 작품을 대하면 거기서 흔적을 찾는다. 이번에 새로 선보이는 금강산 그림 어딘가에도 틀림없이,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소통'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그 흔적을 가슴으로 감지하는 기쁨, 이것은 '타인과의 소통'으로 자기의 영혼을 살찌우는 예술가를 벗으로 둔 자의 양도할 수 없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 Video Feature 2003-11-17 · Artist's Blog
10 Years of Longing for Mt. Geumgang — Shin Jang-sik Solo Exhibition (Artist's Video) (2003)
A video edited and uploaded by the artist on his own blog — introducing his 2003 solo exhibition "10 Years of Longing for Mt. Geumgang" at Savina Museum of Contemporary Art, Seoul (November 17 – December 27, 2003), commemorating the 5th anniversary of Mt. Geumgang tourism. The video weaves together field photographs from the artist's travels to Mt. Geumgang, sketches, and works featured in the exhibition.
- Mixed News 2003-11-14 · The Hankyoreh
Korean Press Coverage — Shin Jang-sik Solo Exhibition '10 Years of Longing for Mt. Geumgang'
Five Korean newspaper reports on Shin Jang-sik's solo exhibition '10 Years of Longing for Mt. Geumgang' at Savina Museum (Nov 17–Dec 24, 2003). Three Hankyoreh articles — Roh Hyung-suk (Nov 14, 2003) introduces the joint exhibition project organized by Hankyoreh and Hyundai Asan for the 5th anniversary of Mt. Geumgang tourism, Son Won-je (Nov 14, 2003) an artist interview, and Kim Bo-geun with photography by Hwang Seok-ju (Nov 16, 2003) another interview foregrounding the artist's quote 'Mt. Geumgang is an Arirang Pass to be crossed.' Kukmin Ilbo, Lee Gwang-hyung (Nov 17, 2003) — a survey of three simultaneous exhibitions (Savina · Kumho Museum · Gallery Art Side) under the heading 'Mt. Geumgang Encounters and Hopes.' Weekly Hankook, Jang Byeong-uk (Dec 18, 2003) — a 'Korean Profile' interview spotlighting Shin's signature 'oil-brush textural method' and the 'Geumgang Meditation' suspended paper sculptures.
Coverage (5)
- The Hankyoreh 2003-11-14 · 노형석
- The Hankyoreh 2003-11-14 · 손원제
- The Hankyoreh 2003-11-16 · 김보근 (사진 황석주)
- Kukmin Ilbo 2003-11-17 · 이광형
- Weekly Hankook 2003-12-18 · 장병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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