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식 작가 노트 〈한맺힌 '아리랑' 고개 넘어, 신바람나는 내고향 찾기〉 (1990년대 중후반)
요약
서양화가 신장식의 작가 노트. 작가 본인의 고향 회상(어린 시절 수성천·앞산·사당·동굴, 중학교 시절 경주 신라문화제 미술실기대회 참가)에서 출발해,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진 '마음의 고향'을 되찾는 일을 자신의 작업 주제로 설정한다. 서양미술 모방의 한계를 짚으며 우리 조형언어의 회복 — 무속·풍수·민화·놀이판 등 기층문화에 뿌리내린 미적 양식의 재발견 — 을 〈아리랑〉 시리즈 작업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한(恨)의 정서가 아닌 고개를 넘는 '의지와 희망'으로서의 아리랑을 재정의한다.
- 출처
- 작가 블로그
- 저자
- 신장식
본문
한맺힌 '아리랑' 고개 넘어, 신바람나는 내고향 찾기
서양화가 신장식
화가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그 화가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현대미술의 여러 대가들은 자신의 마음의 고향으로부터 자신의 조형언어를 창조했다. 나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나의 고향은 어디에 있나? 나의 조형언어를 창조 할 그 원천은 어디에 있나?
고향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물길 따라 흐르던 수천성, 육지나무, 내 어린 몸을 감싸줄 수 있었던 앞산, 그 산으로 가는 길모퉁이의 사당, 용이 산다고 얘기하던 작은 동굴, 우리 놀이의 아지트였던 바위틈, 산놀이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면 개구리·메뚜기 쫓아 찾아가는 수성들, 그 들은 그때만 해도 그렇게 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나의 성장과 더불어 변하였고 내가 생각하는 고향도 달라졌다. 어느 여름날인가 부터 더 이상 수성천에서는 멱을 감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빨래하던 어머니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고 앞산의 모습도 길과 아파트로 바뀌어 갔고, 산으로 가는 길 모퉁이의 사당은 없어졌고, 용이 산다고 얘기했던 작은 동굴도 더 이상 용이 살 것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길에는 아스팔트가 깔려나갔고 그 물에는 제방이 만들어졌다.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중학교를 다닐 때는 경주에서 열리는 신라문화제에 참가 했었다. 계림에서 그 기간에 열리는 미술대회는 경주에 가 볼 수 있다는 핑계로 항상 참여하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경주행 버스를 타고가면서 보는 새벽하늘의 빛깔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엷어져 가는 별빛 속에 형언 할 수 없는 밝음으로 향해하는 그 모습은 영혼의 울림이었다. 새로운 세계로 가는 나그네를 고무시키는 생명의 율동이었다.
경주에서 허물어져 버린 우리문화의 옛 모습과 자연을 느낄 수 있어서 언제나 나를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 마음의 고향의 모습을 그 곳에서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경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나보다.
내가 자라온 시간은 항상 공사 중이었고 건설 중이었다는 기억 또한 강하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콩나물 교실이었으며 새 교실을 지어 나가는 공사장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 역시 산을 깎아 운동장을 만드느라 폭파음과 불도저 소리 속에서 공부해야 했고, 대입시를 준비하여 공부할 때도 교실 옆 복도에서는 창문설치 공사 중이었고 강당 또한 3년 내 공사 중이었다. 겨우 졸업식만 그곳에서 할 수 있었다. 대학 역시 입학해 털털거리며 다녀야 했던 길이, 졸업할때 쯤이 되어서야 포장되었고 건물 또한 완성되었다. 지금도 가끔 보지만 파헤쳐진 길 사이 철판위로 다니는 버스만 타고 다니는 사이 어른이 된 것이다. 내 어릴 때 고향에서, 어른이 될때 까지의 기간은 항상 건설 중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모르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 있는가?
그 공사장, 그 아스팔트 밑에 깔렸나. 내가 자라온 기간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급격히 산업화한 기간이었다. 산이 바뀌고 공장이 만들어지고 집이 바뀌어 갔고 사람들은 더욱더 각박해졌다. 그 와중에 우리 고향의 모습은 바뀌어 갔다. 불도저에 밀려서, 콘크리트 아스팔트에 묻혀서…….
서양문화의 소낙비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 문화의 고향을 찾아가는 나의 마음은 경주 갈 때 새벽하늘의 율동같은 새로운 바람으로 느껴진다.
우리 마음의 고향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 아스팔트 깔리기 전 그 어디에 그 뿌리는 살아 있을 테니까.
대학에서 내가 공부한 것은 무엇인가? 서양문화의 소나기가 뿌려준 언어를, 정신을 학습하기에 바빴다. 남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야 행세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모방의 연속이었고 우리의 새로운 시각언어의 창조는 불가능 하였다.
우리의 조형언어는 어디로 갔나?
이제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서양문화의 소낙비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의 언어를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의 고향을 살리는 길이요 우리문화를 살리는 길이다.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모방이 아니라 내 감정 내 정서를 우리의 형식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21세기를 향하는 우리의 고향을 창조하는 길이다.
나의 작품의 주제는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전통적 시각을 상징하는 어사다. 나의 아리랑 작업의 핵심은 우리의 전통을 오늘의 지평에서 그것이 갖는 본래적인 힘과 건강함을 구현하는데 있다. 전통이란 우리 삶의 절실한 요구에 의해 형성된 생동감 있고 신명 넘치는 것이다. 특히 내가 관심을 두고 나의 작업에 응용한 것은 우리의 기층문화에 의해 형성된 여러 조형언어였다. 무속과 점·복·예언·풍수·참위 등에 쓰여진 각종 도구나 기재 속에 등장하는 미적 표현물과 노동의 고달픔이나 자연의 각종 재해 속에서도 놀이를 통해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던 기층민중들의 놀이판에 쓰여졌던 여러 악기나 기(旗), 도구 속에 나타나고 있는 미적 양식과 취향, 민화에서 보여지는 진실성, 소박성 등등……
민족의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을 근간으로 하는 토속화한 외래종교(불교, 도교, 유교, 음양오행)를 바탕으로 깔고 삶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기층문화의 전통에서 건강한 힘을 발견 한 것이다. 고향의 모습을 발견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나의 작품으로 재창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과거에 고착된 불변의 형태로 보지 않고 오늘의 시점과 지평에서 새롭게 그 의미구조를 드러내 놓아야 했다. 그 의미구조의 핵심은 고향의 모습 같은 조화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음·양, 물·불, 天·地, 선·악까지도 대립적 요소로 보지 않고 그것의 충돌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력으로 통합되는 조화되고 화합하는 건강한 힘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는 아리랑으로 표상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렇듯이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는 아리랑에서는 역사의 고개를 넘어가는 고난과 한, 슬픔이 담겨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러한 슬픔보다는 그 고개를 넘고자하는 의지와 희망을 더 강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퇴락한 고향을 생각 할 것이 아니라 힘과 신바람이 있는 우리의 고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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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기획기사 2026-05-26
〈아리랑〉 시리즈 4점 (1991), 대영박물관 소장의 의미는?
1991년 11월 23일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이 신장식 작가의 〈아리랑〉 시리즈 목판화 4점을 한국 컬렉션에 한 차례에 수용했다. 4 작품의 acquisition number는 1991,1123,0.11부터 0.14까지 연속된다.
4 작품의 모티프는 둥근 사각형의 격자(0.11) · 동심원 안 촛불의 행렬(0.12) · 부채형 위 풀어낸 색채(0.13) · 아치형 창의 반복(0.14)으로 서로 다르다. 한 곡의 민요가 약 3,600개 variation을 갖는 〈아리랑〉의 본질에 대응하듯, 작가는 같은 컨셉을 매번 다른 시각 언어로 변주했다. 특히 0.13은 작가가 시리즈명("아리랑-아침 III")과 Edition 10/11을 명시한 부채형 판화로, 시리즈 안 본인의 작업 흐름을 표시한 가시 사례다.
대영박물관 한국실(Room 67, The Korea Foundation Gallery)은 본 4 작품 등록 9년 후인 2000년에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후원으로 신설되었고,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 grant로 재정비됐다. 박물관 측은 한국 컬렉션 정책을 "definite Korean quality"의 작품을 우선 수용한다고 명시해 왔다 — international-style modern art와 구분되는 한국 정체성이 명확한 작품을 선별 수용하는 입장이다. 본 1991년 acquisition은 한국실 신설 한참 이전인 9년 전 acquisition으로, 박물관 측 동시대 한국 미술 적극 수용 흐름의 초기 사례에 해당한다.
화가의 작품이 대영박물관에 영구 수용된다는 사실은 단순한 컬렉션 추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영박물관은 1753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국립 박물관이며, AD 300년부터 동시대에 이르는 인류의 시각 문화 전반을 한 자리에 모은 기관이다. 작품이 그 한국 컬렉션의 일원으로 영구 보존되고 학자·연구자·visitor에게 공개된다는 것은 그 작가의 시각 언어가 한국 미술사의 한 단편으로 인정된 신호로 해석된다. 박물관 측 설명에 따르면 최근 한국 미술 가격 상승으로 "주요 작품 acquisition이 점점 어려워졌다"고 명시되어 있어, 1991년 시점의 4점 한 차례 수용은 비교적 적극적 acquisition 시기로 기록된다.
〈아리랑〉은 한국과 북한 양국이 2012년·2014년에 각각 UNESCO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한 한국 민요로, 약 60개 base version에 3,600개 이상의 variation으로 전승되어 왔다. 한(恨)의 정서 — 20세기 식민·분단 경험에서 비롯된 슬픔과 인내 — 와 함께 공동체 회복·평화 화해의 양면 정서를 담는다. UNESCO는 본 곡을 "사회적 관계 강화·상호 존중·평화로운 사회 발전에 기여하며,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하고 슬픔을 극복하도록 돕는 곡"이라 표명한다. 작가의 1989-1991년 〈아리랑〉 시리즈는 본 컨셉을 동시대 시각 언어로 풀어낸 시각화로, 4 작품의 다양 모티프는 한 곡의 3,600 variation에 대응하는 시각적 다원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1989년 베를린 Galerie Roho에서 〈아리랑〉 시리즈로 첫 해외 개인전을 열었고, 1990년 오사카 ON GALLERY로 순회했다. 같은 시기 1989년 〈아리랑-기쁜날 Ⅴ〉으로 제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며 국내 인정을 받았으며, 1989·1991·1993년 와카야마 국제 판화 비엔날레에서 2등상을 수상해 일본 미술계의 인정을 받았다. 1991년 11월 대영박물관의 본 4점 한 차례 수용은 작가의 이 흐름의 결정적 진입점에 해당한다 — 한국실 신설(2000) 9년 전, UNESCO 무형문화유산 등재(2012) 21년 전, BTS 5집 〈Arirang〉 명명(2026) 35년 전이라는 시간 격차를 두고 본 acquisition이 자리한다. 작가의 1989-1991년 〈아리랑〉 시리즈 활동은 본 컨셉의 국제 무대 진입 초기 흐름의 결정적 사례를 만들었다.
보도 매체 (4)
- The British Museum 1991
- The British Museum 1991
- The British Museum 1991
- The British Museum 1991
-
![[관련 작품] 아리랑 아침](/works/1988-001.jpg)
![[관련 작품] 아리랑 -기쁜날](/works/1992-02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