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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1996

신장식 작가 노트 〈한맺힌 '아리랑' 고개 넘어, 신바람나는 내고향 찾기〉 (1990년대 중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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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서양화가 신장식의 작가 노트. 작가 본인의 고향 회상(어린 시절 수성천·앞산·사당·동굴, 중학교 시절 경주 신라문화제 미술실기대회 참가)에서 출발해,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진 '마음의 고향'을 되찾는 일을 자신의 작업 주제로 설정한다. 서양미술 모방의 한계를 짚으며 우리 조형언어의 회복 — 무속·풍수·민화·놀이판 등 기층문화에 뿌리내린 미적 양식의 재발견 — 을 〈아리랑〉 시리즈 작업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한(恨)의 정서가 아닌 고개를 넘는 '의지와 희망'으로서의 아리랑을 재정의한다.

정보
출처
작가 블로그
저자
신장식

본문

한맺힌 '아리랑' 고개 넘어, 신바람나는 내고향 찾기

서양화가 신장식

화가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그 화가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현대미술의 여러 대가들은 자신의 마음의 고향으로부터 자신의 조형언어를 창조했다. 나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나의 고향은 어디에 있나? 나의 조형언어를 창조 할 그 원천은 어디에 있나?

고향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물길 따라 흐르던 수천성, 육지나무, 내 어린 몸을 감싸줄 수 있었던 앞산, 그 산으로 가는 길모퉁이의 사당, 용이 산다고 얘기하던 작은 동굴, 우리 놀이의 아지트였던 바위틈, 산놀이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면 개구리·메뚜기 쫓아 찾아가는 수성들, 그 들은 그때만 해도 그렇게 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나의 성장과 더불어 변하였고 내가 생각하는 고향도 달라졌다. 어느 여름날인가 부터 더 이상 수성천에서는 멱을 감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빨래하던 어머니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고 앞산의 모습도 길과 아파트로 바뀌어 갔고, 산으로 가는 길 모퉁이의 사당은 없어졌고, 용이 산다고 얘기했던 작은 동굴도 더 이상 용이 살 것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길에는 아스팔트가 깔려나갔고 그 물에는 제방이 만들어졌다.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중학교를 다닐 때는 경주에서 열리는 신라문화제에 참가 했었다. 계림에서 그 기간에 열리는 미술대회는 경주에 가 볼 수 있다는 핑계로 항상 참여하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경주행 버스를 타고가면서 보는 새벽하늘의 빛깔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엷어져 가는 별빛 속에 형언 할 수 없는 밝음으로 향해하는 그 모습은 영혼의 울림이었다. 새로운 세계로 가는 나그네를 고무시키는 생명의 율동이었다.

경주에서 허물어져 버린 우리문화의 옛 모습과 자연을 느낄 수 있어서 언제나 나를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 마음의 고향의 모습을 그 곳에서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경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나보다.

내가 자라온 시간은 항상 공사 중이었고 건설 중이었다는 기억 또한 강하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콩나물 교실이었으며 새 교실을 지어 나가는 공사장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 역시 산을 깎아 운동장을 만드느라 폭파음과 불도저 소리 속에서 공부해야 했고, 대입시를 준비하여 공부할 때도 교실 옆 복도에서는 창문설치 공사 중이었고 강당 또한 3년 내 공사 중이었다. 겨우 졸업식만 그곳에서 할 수 있었다. 대학 역시 입학해 털털거리며 다녀야 했던 길이, 졸업할때 쯤이 되어서야 포장되었고 건물 또한 완성되었다. 지금도 가끔 보지만 파헤쳐진 길 사이 철판위로 다니는 버스만 타고 다니는 사이 어른이 된 것이다. 내 어릴 때 고향에서, 어른이 될때 까지의 기간은 항상 건설 중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모르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 있는가?

그 공사장, 그 아스팔트 밑에 깔렸나. 내가 자라온 기간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급격히 산업화한 기간이었다. 산이 바뀌고 공장이 만들어지고 집이 바뀌어 갔고 사람들은 더욱더 각박해졌다. 그 와중에 우리 고향의 모습은 바뀌어 갔다. 불도저에 밀려서, 콘크리트 아스팔트에 묻혀서…….

서양문화의 소낙비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 문화의 고향을 찾아가는 나의 마음은 경주 갈 때 새벽하늘의 율동같은 새로운 바람으로 느껴진다.

우리 마음의 고향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 아스팔트 깔리기 전 그 어디에 그 뿌리는 살아 있을 테니까.

대학에서 내가 공부한 것은 무엇인가? 서양문화의 소나기가 뿌려준 언어를, 정신을 학습하기에 바빴다. 남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야 행세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모방의 연속이었고 우리의 새로운 시각언어의 창조는 불가능 하였다.

우리의 조형언어는 어디로 갔나?

이제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서양문화의 소낙비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의 언어를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의 고향을 살리는 길이요 우리문화를 살리는 길이다.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모방이 아니라 내 감정 내 정서를 우리의 형식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21세기를 향하는 우리의 고향을 창조하는 길이다.

나의 작품의 주제는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전통적 시각을 상징하는 어사다. 나의 아리랑 작업의 핵심은 우리의 전통을 오늘의 지평에서 그것이 갖는 본래적인 힘과 건강함을 구현하는데 있다. 전통이란 우리 삶의 절실한 요구에 의해 형성된 생동감 있고 신명 넘치는 것이다. 특히 내가 관심을 두고 나의 작업에 응용한 것은 우리의 기층문화에 의해 형성된 여러 조형언어였다. 무속과 점·복·예언·풍수·참위 등에 쓰여진 각종 도구나 기재 속에 등장하는 미적 표현물과 노동의 고달픔이나 자연의 각종 재해 속에서도 놀이를 통해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던 기층민중들의 놀이판에 쓰여졌던 여러 악기나 기(旗), 도구 속에 나타나고 있는 미적 양식과 취향, 민화에서 보여지는 진실성, 소박성 등등……

민족의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을 근간으로 하는 토속화한 외래종교(불교, 도교, 유교, 음양오행)를 바탕으로 깔고 삶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기층문화의 전통에서 건강한 힘을 발견 한 것이다. 고향의 모습을 발견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나의 작품으로 재창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과거에 고착된 불변의 형태로 보지 않고 오늘의 시점과 지평에서 새롭게 그 의미구조를 드러내 놓아야 했다. 그 의미구조의 핵심은 고향의 모습 같은 조화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음·양, 물·불, 天·地, 선·악까지도 대립적 요소로 보지 않고 그것의 충돌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력으로 통합되는 조화되고 화합하는 건강한 힘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는 아리랑으로 표상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렇듯이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는 아리랑에서는 역사의 고개를 넘어가는 고난과 한, 슬픔이 담겨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러한 슬픔보다는 그 고개를 넘고자하는 의지와 희망을 더 강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퇴락한 고향을 생각 할 것이 아니라 힘과 신바람이 있는 우리의 고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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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블로그 포스팅 90088674268에서 신장식 작가의 긴 회고·작업관 글과 작가 사진 2장(작업실 모습·1974년 경주 신라문화제 미술실기대회 어린 시절 사진)을 수집. 두 사진은 잡지 또는 신문 page의 일부로 흑백 인쇄 톤이라 본 글이 매체 게재 자료일 가능성 있으나 매체명·정확한 게재 시점은 미상 — 본문에 '21세기를 향하는' 표현이 있어 1990년대 중후반(1996년경) 추정으로 date 표기. 작가 검수 시 매체·정확 시점 확정 필요. 같은 포스팅의 3·4번 이미지는 작품 사진(1988-001·1992-023 도판 추정)으로 본 archive 미포함 — 작품 데이터와 매체/노트 자료 분리. 본문은 작가 본인 회고·작업관 글이라 그대로 body에 보존(2026-05-16 저녁 결정 — 작가·평론가 본인 글은 body 노출 OK). 영문 번역은 추후 작업 — 현재 body_en 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