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Geumgang — Vitality
1999 · 728×227 cm · Korean Paper, Acrylic on Canvas
Shin Jang-sik 〈Meditation — Mt. Geumgang〉 — Installation Views (2001)
Installation views of Shin Jang-sik's solo exhibition 〈Meditation — Mt. Geumgang〉, which opened as the inaugural show of Kookmin University Art Gallery in September 2001 and continued at Wooduk Gallery. The set includes views of the eight-canvas 〈Mt. Geumgang Manmulsang — 1998.11.21〉, 〈Mt. Geumgang from Sangpaldam〉 (681×181 cm), the eleven seated hanji 〈Meditation〉 figures, and exhibition-related materials (including the Monthly Art Magazine advertisement preserved by the artist).
Related materials for this work
- Text Review 2001-08-01 · 강태성
"Mt. Geumgang, 'para-doxa'" — Kang Tae-seong review (2001)
필자가 지금 묵는 방 밖에는, 근대의 바로크와 신고전적인 양식의 검소하면서도, 요란한 장식이 갖춰진 공간들 사이에, 아주 좁다란 길들이 몇 갈래 나있다. 좁게 열린 통로는 마치 굴뚝처럼, 자동차의 매캐한 매연으로 코를 찌른다. 이곳에서 느끼는 것은 과거의 찬란함과 현재의 ‘매연’의 병열적인 사실들이다. 병열적인 사실들은 역사적 유물과 함께, 현재의 이탈리아 G8의 정상회의 그리고 anti-globalisation 의 운동으로 참여한 사람이 살해되는 상황 등으로 나타나며, 여러 의미의 축들이 병존되는 구조를 이해하게 한다. 이런 병존적이며 역설적인 구조는 작가 신장식의 금번 개인전에 제시될 작품에서 보이며 지금 이 보여지는 병렬성이 그의 다층적인 구조를 더욱 의미있게 생각하게 한다.
금번 작가의 전시회에 제시될 작품들은 금강산을 소재로 한다. 금강산의 의미는 우리에게는 단순히 명산의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우리의 명산이자, 분단의 사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비무장지대(?) 이다. 그곳을 찾을 수 있는 제한된 자유가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이며 동시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역설’의 장소이다. 즉, 우리 현대사의 수 많은 정황과 역사가 얽힌 곳이며, 현재 전개되는 남북한의 그리고 동북아의 첨예하고도 복잡한 정치적 정황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재는 과거와의 시간적인 축을 갖는 역사라는 의미와 함께 대조되어, 더욱 더 강조된다. 작가는 우리가 갈 수 없었을 때부터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금강산은 되찾아야 될 ‘자연’, 즉 한국의 자연으로서, 우리의 희망과 정황이 담긴 공간이며, 그러면서도, 갈 수 없는 ‘비어진 공간’이였다. 작가의 이러한 소재에 대한 내용들은 다양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보여진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은 회화로서, 그리고, 다양한 정황으로서의 비판적이면서도 명상적, 반성적인 의미들은 입체작품으로 제시된다.
그의 작품 “금강산 만물상-1998.11.21”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풍경과 사람들이 다소 겹치며 전개된다. 그 사람들은 작가와 동행했던 남쪽 한국의 사람들로서, 정치적이며, 경제적으로 환경-자연 등 그림 외적 정황의 의미와 연관된다. 이 작품은 완전히 같은 금강산이며 겹쳐진 공간이면서도 현재의 남북의 정황과 다른 면을 보여주는 ‘동 떨어진’, 잘려진 특성으로 연출된다. 떨어진 공간, 떨어진 화면은 관람자에게 더욱 파편화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추론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우리의 땅이자 동시에 아닌, 갈 수 없으면서도, 갈 수 있게 된 지금의 상황을 인식하게 한다.
이 같은 작가는 과거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명상과 청사초롱의 소재에서 보이듯이, 그의 작품은 그림 외적 정황(contexte, con - text)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작품은 역사성과 함께 사회성 등 여러 당대적 특성 (con-temporary)을 연관시킨다. 또한 여기서 거론되는 당대성(contemporary)과 정황(context)에서의 ‘con’이라는 의미를 ‘함께’ 생각(consider)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함께’라는 뜻을 갖는 con(cum)이 ‘다른 것 또는 사람’을 ‘동시에 관계적’인 것으로 생각해 보며, 레비나스의 다른 ‘자아’(alter ego)로서 타인, 타자를 연관관계로 이해한다. 타자는 독립된 절대적인 단위로서만이 아니라, 또 다른 자아와 상호 연관적이면서도 정황적인 존재이다. 새로운 정황 속에 ‘인간’, 타자와 함께 있을 존재자들의 관계 또는 조화의 가능성을 그의 그림에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대한 이해와 반성은 그의 작품이 완전히 자기 지시적 모더니즘과는 다르게, 그림 외적 정황과 함께 이야기되는 담론의 구조를 갖게한다.
여기서 더욱 관심을 갖게 하는 점은 작품에서 제시되는 정황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개념을 단순하게 지시하는 referential 기능이기보다는 역설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일 예로, ‘명상’이라는 주제이자 소재에서, 설치작품의 인물 등에서 다른 시간대에 제시된 사실들이 병치된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제시되는 병열성은 더욱 병열적인 의견으로 (para-doxa)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가 직접 금강산에 여러 차례 가 보면서 관찰하며 그렸던 작품에서 한국의 병렬적인 특성인 남북의 의미, 그 남북의 병렬적 상황에서 분리된 아주 비자연스런 공간을 이해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금강산은 온 겨레의 자랑인 아름다운 산이기에, 여러 정황적으로 의미로서, 역설적인(paradoxe) 공간이다.
그의 그림은 이런 병열적인 공간에서, ‘현실 병시, 부정’이라는 두 가지 틀을 보여준다. 현실은 주제가 갖는 재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이, 병시에 의해, 부정의 의미를 갖는다. 병시에서 나타나는 병열은 두 가지가 구분된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즉 병열은 여러 개의 단위가 그대로 섞이지 않고 유지되는 것으로, ‘구분’, ‘단절, ‘분열’의 의미가 있다. 그의 일련의 회화 작업에서, ‘그리기’와 ‘뿌리기’의 행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서, 병열성을 강조한다.
뿌려진 선들은 반복적으로 노란 색, 빨간색 등으로 다채롭게 엉켜진 듬성한 공간을 만들어 놓는다. 먼 거리에서 보기에는 이런 색상들이 다양하게 보여지나, 가까이에서는 다양한 색상과 함께, 수많은 바늘들이 꽂혀 있어서 멀리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다가온다.
그의 역설적이며, 병열적인 공간은 보는 시점이 가깝고 멀리 있다는 차이에 따라 이원적으로 구성된다. 그의 회화작품에서의 먼저 그려진 층과 뒤에 그려진 층 역시 같은 이원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원성은 ‘역설’이자, 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럴 때, 두 가지 다른 성격은 표현적인 이질성을 갖기도 하면서도, 부정이라는 성격을 제시한다. 이러한 부정성은 표현방법에서도 대비되며, 선과 뿌린 선, 즉 의도적인 선과 다소 무의식과 우연이 참여된 선들에서 다층적인 의식이 제시된다. 이러한 복수의 의미 공간과 표현공간은 ‘복선의 이야기 구조’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작가를 뜬 인물상들은 병열적으로 전시장에 제시된다. 아름다우면서도, 다소 끔찍한 모습에서 그의 역설적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으며(단풍-피멍), 의미에 있어서의 복수성을 병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거리와 근거리의 이중적 특징, 그려진 산과 그 위의 뿌려진 물감층은 이중적인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처음 그려진 층(A)와 나중에 뿌려진 층(B) 사이의 관계는 두가지 병열적인 의미관계를 주는데, 이는 조각상에서 보여지는 가까운 거리와 멀리 떨어진 거리 보이는 두가지의 이중적 특성과도 같은 것이다. 이 때, 의미의 순서가 생긴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는 먼저 보여지는 측면, 즉 멀리서 보는 위치가 먼저 이야기 될 것이며, 뒤에 읽는 구조가 나중에 보여지는 후차적인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이 전후에 읽혀지는 두 가지 상이한 구조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적으로 의미를 취하는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즉 a or b의 의미구조(즉 a 이나 b 중 하나만 옳아도 참인 구조인 선택적인 구조) 이기보다는 a and b 의 구조이다. 이것이 바로 a와 b의 다른 것(alter)의 병존이다. 다시 보면,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부정’의 의미, ‘alteration’ 상이화시키는 구조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의 다른 것들, 거리상, 표면상에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개의 동일한 인물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데 있어서 발견되는 동일성과 반복성은 예를 들면, 여러 개의 인물상(작가의 모습)들을 반복적으로 전시장에 다양하게 이질적으로 펼쳐놓아, 복합한 의미공간을 구성한다. 멀리서 볼 때, 비늘 같이 반짝이는 모양의 실제 바늘 조각상(비늘-바늘의 구조)과 단풍-멍 (멀리서 볼 때, 단풍처럼 아름다운 색상들, 가까이 볼 때, 피멍과 유사한 인상의 색상) 등에서 이중적 구조를 갖는 조각들이 평행적으로 보여진다. 즉 다양한 의미들의 ‘쌓여진 소리’ 또는 집적된 뜻들을 전달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주제로서의 ‘명상’이라는 ‘조용함’을 함축하는 의미와도 다르게 ‘쌓여진 소리’라는 부정과 역설의 공간을 가능케한다. 그의 이러한 병렬성과 파라독스는 현재 미술의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강태성, 2001년 8월 1일
- Text Review 2001-10-01 · 양정무
"Shin Jang-sik Exhibition" — Yang Jeong-mu review (2001)
신장식이 《겨레의 회화집》에서 분단 이후 잊혀져 버린 금강산을 다시 꺼내 작업해 온 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의 두께 때문일까? 그의 금강산은 신비로운 숭배의 대상에서 이제 작가 자신의 정서적 재현 대상으로 선회하려 하고 있다. 신장식의 〈명상-금강산전〉은 그가 금강산을 주제로 놓고 벌여 온 8번째 게임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그의 금강산 봉우리는 계속 파란색이었고 뿌리기와 점찍기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간 차용해 온 18세기 조선 대가들의 준법이나 19세기 분절적인 민화의 형태감은 크게 후퇴한 대신, 사실적인 구도와 명암, 뚜렷한 능선이 이를 대체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금강산은 이제 구체적이다.
사실 금강산에 대한 지금까지 그의 진술은 간접적이었다. 완성된 화면을 최종적으로 부정하듯 화면을 가득 메워 버린 뿌리기가 증명해 주듯이, 그에게서 금강산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경배 대상이었다. 물론 이를 변화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햇볕정책으로 뚫린 바닷길을 통한 금강산 산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변신을 일종의 ‘답사후유증’으로 볼 수는 없다.
나는 이번 전시 작품 중 〈금강산 만물상-1998.11.21〉을 주목한다. 여기서 신장식은 눈앞에 펼쳐진 금강산을 8개의 캔버스로 분해시켜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 신비로움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파괴의 논조는 작가의 기질을 반영하듯 나지막하다. 전시장 허공에는 작가 자신의 몸을 틀로 삼아 찍어낸 11개의 한지 조각상이 떠돌고 있다. 마치 전시장 각면을 점유한 화면을 바라보고 명상하는 듯한 복제된 화가의 결가부좌상은 이번 전시의 속깊은 주제가 바로 작가 자신임을 말해 준다. 철책선 너머 금강산의 낮과 밤을 발로 디디고 체험하며 그는 산보다는 바로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 감정은 조각상의 표피에 숨김없이 각인되어 있다.
11개의 한지 조각상들 사이에서 보이는 약간의 불협화음이 앞으로 정돈만 된다면(일부 조각 외피에 있는 단순반복적 채색은 그가 그간 걸어온 조형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의 작품은 금강산이 그리움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듯이 한국작가들의 자아표현을 위한 영감의 진원지로 또다시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실례가 될 것이다.
— 양정무·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 Text Review 2005-07-01 · 유시민
"The Joy of Having a Painter Friend, Shin Jang-sik, the Aesthetics of His Communication" — Yoo Si-min Critique (2005)
널리 퍼진 선입견에 따르면 예술가는 보통사람들과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화가는 그 가운데서도 유달리 '난해한 괴짜'로 통한다. 이런 선입견이 얼마나 진실과 일치하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나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전혀 근거 없는 편견만은 아닌 듯하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일하는 곳의 풍경이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업실은 책이 가득 꽂힌 고풍스런 서가(書架)와 원고지가 어지럽게 널린 책상을 떠올리게 한다. 피아니스트의 연습공간은 윤기가 흐르는 악기와 감미로운 소리, 길고 우아한 손놀림 같은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화가의 작업공간은 철물 건축자재를 취급하는 문래동 뒷골목의 이른바 '마찌꼬바'와 비슷하다. 캔버스와 작업도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익숙지 않은 방문객은 걸음 떼기가 겁이 난다. 작업실의 주인이 애주당원(愛酒黨員)이라면 담배꽁초가 들어앉은 빈 술병도 한 몫을 한다. 그가 가난한 '무명화가'인 경우에는 틀림없이 바닥에 찌꺼기가 말라붙은 컵라면 용기도 굴러다닐 것이다. 화랑에 내걸린 작품과 달리, 화가의 작업실에서 '예술의 향기'를 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지금껏 겪어본 화가의 작업공간은 이런 곳이었다.
화가 그 자신도 작업공간에 뒤지지 않는다. 여름밤을 꼬박 새며 일을 한 미술 선생님이 윗통을 벗어제친 채 박카스 병을 입에 물고 스트레칭을 하는 광경을 나는 학창시절 학교 미술실 복도에서 본 적이 있다. 요즘 말로 해서 그야말로 '엽기'였다. 저마다 특징이 있겠지만 내가 본 '그림하는 사람들'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종의 문제'에 저마다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문제인지는 열심히 귀동냥을 해 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끝내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작업실'에서 '그런 사람들'이 만든 것이니 만큼, 작품 역시 만만치가 않다. 방학숙제용 팜플렛을 모으기 위해 전시장을 처음 기웃거렸던 시절 이후 지금까지, 나는 미술작품 앞에 서면 품위를 지키는 위선자가 된다. 예컨대 나는 그게 '넓은 벽에 붙어 앉은 파리'를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함께 간 친구는 '바닥에 뱉어놓은 수박 씨' 그림이라고 주장한 작품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무슨 그림이 이 따위람!', 불평을 하면서도 최소한 2분 정도는 그 작품 앞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서 있었다. 작품 그 자체에 몰입하기보다는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예술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는 속물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의 그림 감상법이었던 것이다. 아, 교양인의 길은 정녕 험하기도 하여라!
그런데 이건 사실 나 혼자 책임져야 할 사태는 아니다. 경제학을 전공한답시고 밤낮 미적분 공식과 통계수치를 붙잡고 씨름하느라 예술의 향기를 맡을 기회가 적기는 했지만, 만약 화가들이 부지런히 말을 걸어 주었다면, 그리하여 예술 세계 안의 화가들과 울타리 너머에서 곁눈질을 하는 보통사람들 사이에 폭 넓고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면, 그런 나도 미술 작품을 전시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일을 오늘날처럼 겁내지는 않게 되었을 것 아니겠는가.
앞서 말한 바 '널리 퍼진 편견'에 비추어보면 신장식은 무척 예외적인 존재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기의 직업세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지 논리적으로는 온전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에도 나는 작품과 표정과 어조를 통해서 그가 울타리 너머로 내보내려 하는 미적 감각과 취향과 메시지를 어느 정도 '나름대로'는 짐작할 수가 있다. 이것은 신장식이 '화가에 대한 널리 퍼진 편견'이 무색하게도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술 세계 울타리 밖의 문외한'들과 별 문제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미학적 코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장점이 될지 치명적 약점이 될지 모르겠으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렇다.
단언컨대, 신장식은 남다른 '소통(疏通)의 능력'을 가진 예술가다. 그는 일찍이 학생 시절부터 이런 능력을 발휘했다. 1970년대 중반에 심인(心印)이라는 묘한 이름을 가진 대구의 한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의 동기생들은 신장식이 만든 괴이한 연하장을 몇 장씩은 구입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회탈, 용, 연화무늬, 초가집, 이중섭을 흉내낸 아이들 모습 따위가 등장하는 '신장식표 연하장'은 낮은 가격과 높은 '예술적 품격'에 힘입어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 이 '미술 대중화 사업' 덕분에 그는 겨울방학 때마다 탁탁한 창작활동 자금을 챙기곤 했다.
부자 부모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던 신장식에게 연하장 사업은 중요한 '보급투쟁 루트'였다. 그는 이 자금으로 유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물건을 조달했다. 그리하여 예술적 재능과 물질적 인프라를 모두 갖추게 된 신장식은 5백여 명의 고교 동기생 가운데 유화를 그리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2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나이가 어려 출품자격이 없었던 신장식이 형의 이름을 도용하여 경북도전에 이렇게 그린 유화를 냈다. 그런데 큰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입상을 해버렸다. 그는 이 비밀을 은밀하게 '소통'시켰고, 그 은밀한 소통의 그물에 들어와 있던 친구들은 떼를 지어 전시회장으로 달려갔다. 탁자 위에 도자기와 사과, 모과 따위가 널려 있는 그런 그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장식은 '예술세계 밖의 문외한'들과 수없이 많은 '소통'을 했는데,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던 '소통'은 1977년 봄 대구 시내 어느 독서실 복도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미술대학 진학에 대한 집안의 반대였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미대를 포기할 경우 그가 택할 곳은 경북대학교 상과대학이 유력했다. 신장식은 친구들의 강력한 지원과 격려를 등에 업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결국 미대에 진학했다. 그때 신장식이 화가로 성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뜻을 세우기를 권했던 친구들 가운데 예술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결국 회계사, 변호사, 회사원, 대학교수, 프리랜서 평론가 따위의 직업을 가지게 된 친구들이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소통의 능력' 덕분이었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신장식은 지금, 은행 지점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앉아 신규 발행 고액 수표에 도장을 찍으면서, 날마다 25년 전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를 잘 만나는 것, 예술가의 인생에서도 이보다 큰 행운은 드물다!
88년도 무렵부터 신장식은 어릴 적 외갓집 동네 서낭당에서 본 적이 있는 것과 비슷한 깃발과 청사초롱, 연화무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전통 문양을 그리더니, 나중에는 같은 것을 판화로 찍었다. 그 다음에는 북한산과 광화문을 그렸다. 최근 몇 년 동안 죽어라고 금강산만 그리고 있다. '우리 것' '전통' '역사성' ... 미술평론가들은 그의 작업을 이런 개념을 통해서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신장식이 민족전통을 특별히 숭상하는 내셔널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나는, 그런 개념만으로는 신장식이 그런 것들을 그리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전통문양과 청사초롱, 경복궁, 북한산과 금강산은 그가 시도하는 '소통'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신장식은 아들 딸을 하나씩 둔 평범한 아버지요, 그와 하루가 멀다하고 데이트를 하던 시절에는 분명 그림을 그렸던 여인과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는, 매우 성실한 남편이다. 아무 특별한 정치적 성향도 그 어떤 괴팍한 습관도 없는 '너무나 정상적인 중년남자'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일상을 전혀 시끄럽지 않게 엮어나간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조용히 경청할 때와 적절히 자기 주장을 할 때를 균형 있게 판단한다. 예술을 그 무엇인가에 종속시키는 어리석음도 저지르지 않지만 그것을 역사에서 완전히 분리하는 정반대의 오류에도 빠지지 않는다. 신장식은 한 마디로 말해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전한 시민'으로서, 동시대인과의 폭넓은 '미학적 정서적 소통'을 추구하는 화가인 것이다.
진정 빼어난 예술가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엇'을 창조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상상을 넘어서는 기행(奇行)이나 면벽(面壁)의 절대고독을 거쳐 잉태될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끊임없는 소통(疏通)의 산물일 수도 있다. 신장식은 기행이나 면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건전한, 너무나 건전한 시민'이기에, 나는 그가 지금까지 그렸던, 그리고 앞으로 그리게 될 작품들이 모두 가족과 친구, 이웃과 동시대인, 그리고 역사와 함께 나누었던 깊고 넓은 '소통'의 산물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에는 믿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따른다. 나는 신장식의 작품을 대하면 거기서 흔적을 찾는다. 이번에 새로 선보이는 금강산 그림 어딘가에도 틀림없이,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소통'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그 흔적을 가슴으로 감지하는 기쁨, 이것은 '타인과의 소통'으로 자기의 영혼을 살찌우는 예술가를 벗으로 둔 자의 양도할 수 없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 Mixed Artist's Note 1999-05 · 신장식
Munhwa Ilbo, "Mt. Geumgang Essay — Majestic Form, Canvas Falls Short" — Shin Jang-sik Artist Essay (1999)
지난해 11월 금강산행 첫배를 탐으로써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이 조금은 해갈되었으나 그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열병을 앓듯이 새로운 갈증을 느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금강산을 그곳에 두고 다시 밤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백두대간에 길게 누워 있는 비무장지대(DMZ)의 불빛을 본 것이다.
밤이어서 DMZ의 야간탐조등 불빛은 산의 윤곽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불빛 남쪽에는 점점이 불빛이 연속해 보이고 그 북쪽에는 검은 정적. 그 어둠과 정적 속에 금강산은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을 이렇게 시각적으로, 구체적으로 바라보니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 그려온 스케치와 슬라이드를 검토하면서 금강산을 다녀오면 미친듯이 금강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던 기대와는 달리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왜일까. 금강산이라는,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한 산 그 자체와 미약한 나의 그림이 비교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운에 압도되어 그릴 수가 없었다.
옛 그림과 사진과 자료와 상상 속에서 그려졌던 금강산을 직접 본 후 그리려니 회화의 근본적 질문인 내용과 형식의 합일에 대해 다시 집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렸던 나의 금강산그림 형식은 적절한가. 금강산을 직접 보면서 왜 18세기의 겸재선생님이 이렇게 그렸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의 시점에서 나의 금강산 그림은 어떻게 나의 심성과 정서를 금강산의 실체에 접신시킬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표현의 정당성은 어디에 근거해야 하나…. 복잡미묘한 고민의 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마간산격으로 급하게 본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금 애타게 나타난 것이다. 금강산에 다시 가야겠다. 이제는 언제든지 갈수 있지 않은가. 내 그림의 형식은, 그 새로움은 다시 그곳에 서야 결론이 날 것이다. 김치가 맛을 내려면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나의 금강산 그림 역시 그러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당연히 숙성한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일어났다. 언제 다시 방문하나. 개골을 보았으니 봄이 되면 금강을 다시 보리라. 여름이 되면 봉래도, 가을이 되면 풍악도 보리라. 금강의 사계를 다 경험하면, 그러는 가운데 어쩌다 운이 좋으면 내 영혼 속에 금강산 그림에 대한 새로운 영감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보지 않고 그릴때의 애틋함과 미진함을 생각하며 이렇게 가능한대로 보려고 노력하면 무엇인가 잡힐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속에서 일민미술관에서 기획한 〈다시 찾은 금강산전〉의 제안을 받으니 그 기쁨 말할수 없었다. 나 개인의 관심에서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기획속에서 금강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여러 화가들과 같이 금강을 느끼고 우리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토론하고, 그림으로 경쟁하고, 격려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힘이 솟았다.
4월 16일 저녁 동해항을 떠나 금강산으로 다시 향했다. 해질녘의 장관이 백두대간의 웅혼한 자태와 어우러져 우리국토의 아름다움을 한결 빛내주었다. 그림의 방향을 이번 기회에는 더욱 분명히 잡을 수 있을지, 한 장의 드로잉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웅장하고 화려하며 천변만화하는 금강산을 회화로 조화롭게 표현해낼 영감을 얻기를 기대하며….
장전항으로 입항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선잠을 잔후 뱃전에 서니 지난 겨울 새벽에 입항할 때와는 다르게 밝은 아침 햇살 속에서 제모습을 드러내는 금강산이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을 축복하는 듯이 느껴졌다. 산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입항과정이나 입북과정 등 모든 것이 처음 올 때보다 정리되어 있었고 체계화해 있었다. 온정리를 거쳐 한하계의 미인송 사이로 달려서 만상정에 버스가 닿은 후 만물상전경을 만나기 위해 삼선암쪽으로 앞서 달려나갔다. 봄 기운속의 만물상은 생기와 발랄함으로 우리를 맞았다. 삼선암, 귀면암, 절부암, 안심대, 망장천을 지나 천선대를 단숨에 오르니, 봄의 생기는 만물상 전체를 감싸안고, 따스한 햇살은 스케치하는 내내 다시 찾아온 나를 축복하는 것 같았다. 손이 움직이며 그림이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이 산이 주는 기운이구나 생각하며 수십장의 스케치를 그려나갔다. 다음날 옥류동 가는 길의 창터솔밭길 미인송들은 연푸른 물기를 머금은 생동감으로 우리를 맞았고 연주담의 맑디맑은 물은 비취색의 신비함을 더하고 있었다.
하늘로 날아 오르는듯한 비룡폭포와 웅장한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 구룡폭포는 지난 겨울의 얼어있던 모습과 달리 수량이 불어나서 그 생동감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물의 흐름, 그 소리, 신비한 색, 봄의 냄새, 피어나는 꽃, 물오르는 나무, 웅장한 바위,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생명력으로 교향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몽유금강,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 기운속에서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보니 언제 시간이 다 지났는지 안타깝게도 관광조장은 하산을 재촉하고 있었다.
금강산 그림은 고려 노영의 불화 〈지장보살도〉에서부터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김홍도의 화첩뿐만 아니라 많은 민화와 일제시대 순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 스케치 여행후 그린 해강 김규진의 〈금강산도〉, 〈총석정도〉, 소정 변관식 선생의 〈삼선암〉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특히 금강산 그림은 겸재 정선으로부터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실경으로 사생해내면서 우리의 미학이 세워진 우리 회화사의 성소인 것이다. 우리것을 찾아내고 우리시대의 우리그림에 대한 영감은 이곳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분단이후에는 남한 작가 중에서 금강산을 그린 화가가 없으니 상상과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금강산 그림은 이 시점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 시작해서 93년 개인전부터 98년까지 다섯번의 개인전을 금강산이라는 주제로 발표해 왔다. 사실 나는 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서 미술조감독으로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우리의 정서를 구체화하기 위해 민속적 소재 속에 숨은 조형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청사초롱, 북, 징, 깃발, 경복궁 등의 소재를 〈아리랑〉이라는 테마로 작품활동을 해왔다. 그후 우리 산하 속에 들어 있는 생동감과 생명력을 맨드라미, 들풀, 소나무, 북한산 등을 소재로 그림으로 표현하던 중 이왕이면 우리의 산 중에서 우리 회화의 성소인 금강산을 그려보자고 단순히 생각한 것이 나의 금강산 그림의 출발이었다. 금강산에 가보지 않고 금강산 그림을 그리니 아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그 그림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두 번이나 금강을 만나니 그 생동감과 신명이 나의 그림에도 스며들지 않을까. 아직은 상팔담이나 내금강, 총석정, 신금강 등 직접 보지 못한 곳도 많지만 우리 민족이 가진 신명과 생명력이 이제는 금강산 그림 속에 가능하지 않을까. 장래에는 우리 민족의 분단상황이 극복되어 금강산이 민족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때가 오지 않겠나. 그 때에는 마음껏 볼 것이다.
〈다시찾은 금강산전〉에서는 이러한 신명과 생명력이 나의 그림에 조금이라도 표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급한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만들어 나갈 것이다.
금강산은 나의 금강산이고 우리민족의 금강산이다. 나는 이런 희망을 가져본다. 다음에는 남쪽의 작가뿐만 아니라 북쪽의 작가들도 동참하여 같이 금강산에서 그림을 그리고 우리 미술을 토론하며 서울과 평양에서 발표하면 우리의 상징을 더욱 보배롭게 하지 않겠나. 민족 공통의 정서로 만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나. 사람이 없는 빈 산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산과 그곳의 사람들과 같이 만날 때 기쁨은 더욱 클 것이다.
- Mixed News 1999-07 · Artist's Blog
Press Coverage — 'Dream Journey to Geumgang: 300 Years of Mt. Geumgang Paintings' at Ilmin Museum of Art (1999)
A collection of newspaper coverage photographs documenting the 1999 group exhibition 'Dream Journey to Geumgang: 300 Years of Mt. Geumgang Paintings' at the Ilmin Museum of Art in July 1999. Shin Jang-sik participated as one of the contributing artists; his work 'Mt. Geumgang — Vitality' (1999, 728×227cm, acrylic and hanji on canvas) is mentioned in the coverage.
Coverage (1)
- Artist's Blog 199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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